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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는 인천/인천역사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 특집>기록문화유산의 보고 강화(2)_ 조선 기록문화의 꽃,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서~!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 특집>

기록문화유산의 보고 강화(2)

조선 기록문화의 꽃,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서~!

 

 

 

저번 시간에 이어

기록문화유산의 보고 강화 두 번째 이야기,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관청리 743-1) 고려궁지 내

 

조선의 22대 왕 정조는 1776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해에

규장각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했습니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의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발하여 출판과 정책 연구 기능까지 발휘한 특별한 기구입니다.

 

외규장각 의궤가 있는 고려 궁지를 찾아 떠나 봅시다~~!

고려궁지로 가려면 약간의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을

계속 걸어 올라가셔야 해요~~

용흥궁 공원을 지나~~

문학관을 지나~~

두둥~!

강화 고려 궁지로 들어가는 문 앞이에요. ^^

< 강화고려궁지 >

사적 133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이곳은 고려 시대 궁궐이 있던 곳이다.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년(1232)에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궁궐을 건립하고 39년간 사용하였으나,

몽골과 화친하여 환도(1270) 할 때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행차 시에 머무는 행궁 외에도

유수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만녕전 등을

건립하였으나 이 또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1964년에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고,

1977년 강화 강화 전적지 정화사업으로

보수 정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 시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등이

남아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고려 궁지 안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조선시대에는 고려 궁궐터인 이곳에 여러 관청 건물을 세웠다.

1622년(광해군 14)에 봉선전(태조 영정을 봉안)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1631년(인조 9)에 행궁을 건립하였으며,

1638년(인조 16)에 유수부 동헌을 개수하여,

1654년(효종 5)에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1695(숙종 21) 장녕전,

1713년(숙종 39) 만녕전이 차례로 세워져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1782년(정조 6) 황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 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으나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 중이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태웠다.

 

1964년 고려 궁궐터는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 정비되어 현재는

유수부 동헌, 이방청, 강화동종과

2003년 복원한 외규장각이 있다.

외규장각은 왼쪽 위로 올라가면 있네요~!

강화유수부 동헌

유형문화재 제25호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1638년(인조 16)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1769년(영조 45)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하였다.

명위헌이라는 현판은 영조 대 명필인

백하 윤순이 쓴 것이다.

 

건물 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단층집으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 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관람안내 표지판이에요!

왼쪽으로 들어가셔서 쭉~ 둘러보시고

오른쪽으로 나오시면 돼요.^^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으로

특히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을 사용하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하였다.

 

병인양요 때에도 외규장각에 보관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 군의 눈을 자극한 것도

채색 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신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외규장각에 대해 작은 박물관 형식으로

깔끔하게 전시가 잘 되어 있더라고요~~

발굴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상세하게 나와있어요!

 

< 궁금증을 풀어보는 Q&A 시간 >

 

Q. 왕이 보던 책, 외규장각 의궤가 궁금해요!!

A.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통상 어람용은 1부를 제작하는데, 어람용을 분상용과 비교해 보면

필사, 재료, 장정 등에서 그 수준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이는 어람본의 경우 고급 초주지를,

분상요은 초주지보다 질이 낮은 저 주지를 사용하였다.

이렇듯 고급 종이에 해서체로 정성껏 글을 쓰고 천연 안료로 곱게 그림을 그린 후

고급 비단과 놋쇠 물린으로 장정한 외규장각 의궤는

당대 최고의 도서 수준과 예술적 품격을 보여 준다.

특히 외규장각 의궤 중에서 국내외에는 없는

유일본이 상당수 포함되어 그 중요성이 더욱 크다.

 

Q. 의식의 진행과 의궤의 제작이 궁금해요!!

A. 조선시대에는 거행했던 국가 의식과 행사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의궤를 제작하였다.

의궤의 종류는 왕의 일생과 관련된 것, 각종 제례와 의식과 관련된 것,

편찬 사업이나 건축과 관련된 것 등이 있다.

왕실의 각종 의식 및 행사를 집행하기 위해서

우선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하였다.

의식이 완료되면 도감은 바로 해체되어

의궤청이라는 기구로 바뀌었다.

의궤청은 도감에서 주관한 행사 전반을 정리하여

의궤를 작성하는 기구로,

행사 전반을 총괄한 도청 담당자들이 의궤청에 그대로

임명되는 것이 상례였다.

의궤청은 도감에서 행사 중에 작성한 등록, 행사 관련 문서들 및 반차도를

수집하여 의궤를 작성하였다.

 

Q. 의궤가 145년 만에 귀환되었나요?

A. 1866년 병인앙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약탈하였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100년 넘도록 과거 속에 묻혀 있었다.

지난 1975년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던 고 박병선 박사가

의궤의 존재를 확인하고 목록을 만들어 공개하였다.

1991년 서울대학교에서는 정부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 중인

외규장각 의궤 297책의 반환 추진을 요청하였고,

정부는 프랑스 외무성에 공식 반환을 요청하였다.

2011년 4월 14일부터 5월 27일까지

4차에 걸쳐 외규장각 의궤 296책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부터

14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1993년에 돌아온 1책을 포함하여

외규장각 의궤 297책의 귀환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온 의궤는 '반환'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귀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관청리 743-1) 고려궁지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