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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는 인천/인천역사

[책으로 보는 인천 역사] 남한 유일의 고려왕릉군

 

 

 

안녕하세요, 인천시청입니다.

책으로 보는 인천 100선 이야기 11번째 시간이 왔습니다!

오늘은 남한 유일의 고려왕릉군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할 텐데요.

집중! 또 집중해주세요 ^^

 

 

 

 

 

 

▲가릉

 

왕릉은 왕족의 지위 뿐 아니라 예법에 맞게 세심하게 건축된 복합 시설이라고 할 수 있죠.

고려시대의 왕릉은 대체로 고구려, 신라의 능 형식을 이어받았고 조선시대에 계승되었습니다.

신라시대에는 목재로 안쪽을 댄 넓은 구덩이를 마련해 돌로 채운 다음

흙으로 덮는 고분 방식인 한국 특유의 무덤 체계가 나타나는데요.

통일신라시대에는 사방에 석호, 상석 등 독특한 석물을 배치하는 특유의 개성이 나타났고

평지 뿐 아니라 산지에도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실 가족의 무덤을 신분에 따라 능, 원, 묘로 나누었는데

조선 개국 초기에 조성되어 현재 북한 개성에 자리한 태조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과

정종의 후릉 2기를 제외한 40기의 왕릉이 서울 시내와 근교에 자리 잡고 있지요.

2009년에 40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요.

 

 

 

 

 

 

▲곤릉

 

고려시대의 왕릉들은 신라 방식으로 지어졌지만 산등성이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시냇물 사이에 지어지는 양상을 보입니다.

이 시기의 왕릉은 경계 석주, 석등, T자형 사당, 비석과 비각 같은 새로운 특징들도 갖추고 있고

호랑이, 사자, 양을 조각한 석물들이 봉분을 둘러싸기도 합니다.

능실 내부에 벽화가 그려진 것도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 양식이 이어진 것입니다.

산기슭에 3~4층의 단을 쌒고 맨 윗단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두고

아래로 석등, 문-무인석, 제향각 등을 배치했지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왕릉이 크게 다른 점은 고려의 왕릉은 돌을 쌓아 단을 만들고 돌계단을 만들어

그 상단에 봉분을 조성하지만, 조선시대의 왕릉은 동그스름한 토단 상부에 봉분을 조성한 점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집중적인 도굴이나 6.25전쟁으로 인해 석물들이 파괴, 분실되어

대다수는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지요.

 

 

 

 

 

 

▲석릉

 

개성지역에는 고려 태조의 무덤 등 20여 기의 왕릉이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요.

고려시대 재위 왕은 모두 34명인데, 무덤 임자가 밝혀진 것은 모두 12기이고 현대 모습이 알려진 곳은 태조 왕건의 현릉과 31대 임금인 공민왕,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쌍릉인 현.정릉 정도입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야산 곳곳을 남벌하고 농지를 개간하면서 능역이 크게 축소되었고

혜종, 성종릉의 경우 병풍석과 석축이 파묻혔고, 경종릉은 장명동, 석상, 망주석이 사라졌는데요.

신종릉은 잘못된 복원으로 깨진 난간석이 굴러다니고 민묘처럼 왜소하게 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013년 북한 개성 일대에 집중한 고려시대 유적이 '개성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는데요.

개성역사유적지구는 개성성곽, 만월대와 첨성대 유적, 개성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사, 왕건릉과 공민왕릉, 7릉군, 명릉 등 12개 개별유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강화도에는 현재 2기의 왕릉과 2기의 왕비릉이 남아있는데요.

희종의 문덤인 석릉과 고종의 무덤인 홍릉, 그리고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의 무덤인 곤릉과

원종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 등 총 4기의 고려 왕능이 있지요.

이들 왕능은 모두 고려가 강화로 천도했던 시기에 조성되었는데요.

 

 

 

 

 

▲공릉

 

이들은 천도시기에 강화도에 머물렀던 사실 외에도 인천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주이씨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의 비가 되면서 이후 7대 80년간에 걸쳐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특히 첫째 딸인 인예태후의 아들인 숙종의 후손들입니다.

여기에 숙종의 아들 예종과 그 아들인 인종 역시 인주이씨 이자겸의 딸들과 중첩 혼인을 했고

그로부터 희종-강종-고종-원종으로 계보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현재 고려 왕릉 중, 강화도 외에 남한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공양왕릉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당시 시신을 어디에 묻었는가를 알 수 없어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와 경기도 고양시 두 곳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어느 쪽이 왕릉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고려시대 강화도는 대중국무역의 교통로로써 해상교류의 거점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고려 후기 제 2의 수도로써 왕도이자, 또 왕실의 보장처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홍릉을 비롯한 4기의 고려 왕실릉이나 팔만대장경 조판 등 남겨진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은

남한지역에서 흔히 접할 수 없는 귀중한 고려시대의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