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하는 인천/인천역사

[책으로 보는 인천 역사] 물 반 고기 반 '연평파시'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2. 11. 10:43

 

안녕하세요~ 인천시청과 함께하는 '책으로 보는 인천 100선 이야기' 14번째 시간이에요.

오늘은 물 반 고기 반 '연평파시'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할 텐데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합시다 ^^

 

 

 

 

 

 

 

 

파시란 글자 그대로 물결을 타고 바다에서 열리는 시장을 일컫는 말인데요.

이는 곧 특정 어획물을 어획하는 어장에서 어선과 상선 사이에 매매가 이뤄지는 것을 말하지만

그 어장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어업근거지에서 어업자와 어부를 고객으로 하는

각종 상행위가 이뤄지는 것까지 모두 포괄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파시'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난 문헌은 '세종실록' 지리지인데요.

전라도 영광군의 서쪽을 조기가 나는 '파시평'이라고 하여

봄, 여름 사이 여러 어선이 모두 모여 고기를 잡는다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조기가 나는 곳은 영광의 칠산 바다 뿐만은 아니었는데요.

"필산 바다는 잔 조기고 연평 바다는 큰 조기란다."는 배치기 노래가 있듯이

서해 조기어업의 중심지는 연평도였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마찬가지로 "해주 남쪽 연평평에는 석수어가 나서

봄, 여름에 여러 어선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처럼 매년 11월부터 2월까지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들은 우리나라 서해안으로 북상하여

2~3월에 흑산도, 3~4월에 안마도와 위도를 지나 5~6월에 연평도에 어장을 이루는데,

회유하는 수십 억 마리의 조기를 따라 형성되는 시장이 곧 '파시'인 것입니다.

 

 

 

 

 

 

 

 

 

발동선의 보급과 어구, 어망의 개량으로 연평도 조기 어획량이 크게 늘어난 시기는 일제강점기부터입니다.

당시 연평도는 '석수어의 왕국' '전조선의 찬장', '서조선의 대보고' 등의 수식어를 받으며

조기 어업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중선배, 안강망배할 것 없이 갑판 위까지 가득 조기를 싣고

섬으로 돌아오면 마포, 개성, 인천, 군산 등 각지 상고선, 운반선들과 섞여 바로 판매가 이뤄졌죠.

그리고 어선들 뿐 아니라 1년 내내 조용했던 섬마을에는 선박수리를 위한 공장과 식구미를 위한 잡화점,

그리고 임시우체국과 주재소, 요릿집, 주막, 목욕탕 등의 임시가옥이 세워져 도시가 생성됩니다.

일찍이 연평도는 흑산도파시, 위도파시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파시로 꼽혔는데요.

매년 2,000척이 넘는 어선 및 운반선과 수만 명의 어부들이 들어오면 260호의 요정과 술집이 생기고,

소위 '물새'로 불리는 400명의 작부들이 어부들을 호객하였습니다.

따라서 연평도는 파시철만 되면 해주은행 금고의 돈이 마르고,

"사흘 벌어 1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돈이 흔한 곳이 되기도 했지요.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은 1910년대부터 50년대까지 꾸준히 늘어났는데, 40년대 정점에 올랐습니다.

1946년 22,500톤의 어획을 올렸지만, 이후 50~60년대에는 1만톤을 넘나들 정도로 감소됐지요.

그리고 마침내 1960년대 말이 되자 조기 어획량이 급격히 떨어지며 연평도의 조기 파시는 막을 내립니다.

유자망, 기선저인망 등의 어구를 갖춘 대형화된 동력선들의

마구잡이 어획으로 참조기의 씨가 말라버린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