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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는 인천/인천역사

잊지 못할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그 날

 

 

 

 

잊지 못할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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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발발 64년 후, 참전용사를 만나러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우르르쾅쾅하는 소리를 듣고 마을사람들이 모두 뛰어나왔어요. 그땐 정말 아무것도 챙길 새도 없이 무작정 피난가기에 바빴어요. 그땐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6월 25일은 대한민국 역사의 큰 상처인 6.25 사변(한국전쟁)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가족들과의 이별로 지금까지도 전쟁을 겪은 국민들은 전쟁 중에 이별한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날 안타까운 날 입니다.

 

2014년 현재까지 남북이 서로 총구를 겨누며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그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인 6.25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천 남구에 거주하는 한 6.25 참전용사를 만났습니다.

 


6.25 참전용사, 김강열 할아버지


Q.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니예요. 어서와요."


Q. 몇일 뒤면 6.25사변일인데 할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25일이 다르게 느껴지실텐데요. 어떠세요?

- "오래전일이지만, 또렷하게 그날 새벽이 기억이 나지요. 새벽에 우르르쾅쾅하는 소리를 듣고 마을사람들이 모두 뛰어나왔어요. 그땐 아무것도 챙길새도 없이 무작정 피난가기에 바빴어요. 그땐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Q. 60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신다는 말씀을 들으니 그 날의 기억이 큰 아픔으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 "네 그렇죠. 무엇보다도 그 당시에는 전쟁보다 더 어려웠던 일은 배고픔을 이기는 일이었어요. 전쟁통에 먹을 것도 부족한데다가 잘 곳도 마땅하지 않아서 더 힘들었었죠. 전염병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아프기도 했어요"


Q. 할아버지께서는 그 당시에 어디에서 피난을 오셨나요?

- "북쪽에 있었어요.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네 총각, 피난와서는 수원에 있었지요."


김강열 참전용사는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역사교과서에서 듣던 해방 이후의 한반도 정치 상황과 이념 대립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중에는 교과서에선 볼 수 없던 이야기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6.25 전쟁으로 고통 받았던 상황이 가장 중요하고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김강열 참전용사가 전쟁 중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기위해 수첩에 이것저것 적고있다.


김강열 참전용사는 지리산빨치산토벌을 시작으로 전쟁에 참여하셨다고 합니다. 1950년 전쟁 발발 후 지리산에 남아있는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작전에 참여한 후 국군으로 편입되었다고 합니다.


Q. 할아버지께선 언제부터 6.25 전쟁에 참여하셨나요.

- "1950년대에는 남한에도 빨치산들이 많았어요. 그때 지리산에 숨어있는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작전이 있었는데 그 작전이 시작된 때부터 민간인들이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나도 그때부터 총을 잡았지"


Q. 아, 그럼 할아버지께서는 처음부터 국군으로 전쟁에 참여하신 것이 아니었네요.  

- "네, 지리산빨치산토벌작전 이후 그 다음해에 국군에 편입이 됐고 바로 동부전선에 해당하는 인제에 병사로 전쟁에 참여했어요.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국군으로 입대하는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Q. 그 당시 동부전선에서 생활하셨던 이야기를 조금 여쭤봐도 될까요.

- "당시 국군에 들어온 병사들은 대학생들이 많았고, 군사훈련을 완벽하게 받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오발사고도 많았고,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의 사기도 많이 저하 됐었어요. 무기도 질적으로 떨어졌고 신식 무기도 제대로 보급이 되기가 어려웠고 모든 것이 열악했었어요."


Q. 그럼 훈련 중이나 작전 수행 중에도 사고가 많이 일어났을테고, 무기도 제대로 보급이 안돼서 실제 교전 중에서도 전투가 일방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거군요.

- "사고도 많이 났었고, 군수물자가 부족하고 작전 상황이 어려워서 교전 중에 많은 전우들이 죽었죠. 우리 국군이 서울에서 낙동강방어선까지 퇴각할때까지 정말 많이 희생됐어요. 잠들기 전에 생각이 많이났죠. 나는 병사로 복무도중에 간부후보생시험을 보고 소위로 임관을해서 소대장으로 전쟁에 참여했어요. 그땐 인천상륙작전이후로 우리 국군이 북으로 올라갔었을 때 였는데, 그 때도 부하들이 많이 죽었죠."


인터뷰 중 김강열 참전용사의 눈가에는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있었습니다. 오늘 아침까지 함께하던 전우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어느 누가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김강열 참전용사는 지금도 옛날 생각을 하면 "전우들은 그 날 떠났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미안하다"고 합니다.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상처가 전우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더 커져 아물지 않은 듯 합니다.

 


▲2013년에 국가보훈처에서 받은 호국영웅기장증과 훈장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조금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로! 옆에 계신 할머니를 전쟁 중에 만났다는 점이죠! 어디에서 만났냐고요? 바로 여기! 인천에서 만났다고 하셨습니다. 무서웠던 전쟁 속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조금씩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셨다고 합니다.


▲김강열 참전용사와 이계본 할머니


당시 인천은 한,미 해병대를 중심으로 이뤄진 함포사격과 상륙작전으로 건물과 농경지등이 파괴되거나 불이나 불길이 높게 치솟았다고 합니다. 2014년 현재 인천의 모습이 더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전쟁당시의 인천을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낯설지가 않습니다. 지난 2010년 11월에 발생한 연평도포격과 유사한 사진입니다.

 


▲ 한,미 해병대의 인천상륙작전 당시사진 

(*사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강열 참전용사는 인터뷰를 마치고,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편안함은 과거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은 휴전상태이기에 언제든지 북한과의 전쟁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올해로 6.25전쟁 64주년, 상처받은 참전용사의 마음과 그리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이산가족의 마음을 위로하고, 피와 희생으로 이 땅과 바다, 하늘을 지킨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으로 그 분 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는 것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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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