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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는 인천/여행·명소

옛것과 새것 어우러진 인천 유일의 대학가 '인하대학교 대학가'


옛것과 새것 어우러진 인천 유일의 대학가 

인하대학교 대학가


대학가는 언제 어느때나 싱그러움으로 반짝인다. 젊고 활기찬 기운이 물씬 느껴진다. 인천의 유일한(?)대학가인 인하대 후문 주변은 젊은 분위기, 밝고 맑은, 젊은 얼굴들이 거리를 누빈다. 청춘은 피어나는 꽃처럼 주변을 화사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인하대 후문 대학가는 젊은 희망들과 함께 60여 년을 웃고, 울고, 즐기며 성장 해왔다. 대학이 있었기에 대학생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고, 이들을 상대로 상권은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다.


글 이용남 굿모닝인천편집위원  사진 임운석 자유사진가





정문보다 후문이 발달한 특이한 대학가

인하대는 다른 대학가와 달리 후문 문화가 발달했다. 서울의 홍대, 신촌 등이 정문을 중심으로 상권이 들어서고 대학문화가 발전한 반면 인하대는 후문으로 교통편과 대학상권이 발달한 특이한 케이스다. 인하대 정문이 공장지대인 원인도 크다.


3월 인하대 대학가는 젊음의 특권인 자유와 낭만이 바이러스처럼 퍼져있다. 오리엔테이션, 학생회 모임, 동아리 활동 등으로 교내는 활기차다. 각종모임, 행사를 공지하는 작은 알림판이 곳곳에 나부낀다. 젊음은 항상 생동감 넘친다. 1954년 인하대가 건립될 당시만 해도 이곳은 논과 밭이었다. 학교가 건립되면서 주변에 상가건물이 하나 둘 들어섰고, 80년대 초반만 해도 후문 큰길 주변으로만 상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인하대 후문 문화의거리는 이곳 대학가의 중심 상권이다. ‘인하문화의거리’ 간판이 서 있는 사거리를 학생들은 ‘고민사거리’ 또는 ‘약국사거리’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술을 먹을지, 밥을 먹으러 갈지 또는 다른 곳으로 갈지를 고민한 뒤 움직였다.  


인하대는 지방학생이 많은 편이다. 후문 상가 뒤쪽으로는 지방학생들을 상대하는 하숙과 기숙을 치는 집들이 즐비했다. 하숙이든 기숙이든 방을 놓는다는 전단지만 나가면 학생들이 득달같이 와서 계약을 했다. 방이 모자라던 시절의 이야기다.


10여 년 전부터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원룸 붐이 불면서 이제 하숙과 기숙방을 찾는 학생들은 없다. 아무리 기숙방이 싸도 독립된 공간을 원하는 추세 때문이다. 인하대 후문 도로변을 지나다 보면 기숙방을 운영하는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방을 구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호객행위를 한다. “방 얻을려구 그래? 좋은 방 있는데 한번 가볼라우…”. 상가나 길가를 서성이다 보면 심심치 않게 보는 풍경이다.


인하대 후문에서 35년간 하숙과 기숙을 쳐왔던 신삼재 할아버지(83)의 집은 할머니(78)가 하숙을 하다 10여 년 전부터 기숙방을 하고 있지만 학생들이 없다. 기숙방의 한달 방세는 11만원. 잠 만자는 곳이지만 책상, 세탁기, 냉장고 사용이 가능하다. 원룸에 비해 정말 착한 가격이다. “옛날 하숙할 때 정말 재미났어. 학생들도 다 한가족 같았지 뭐. 마루에 큰 상차려 놓으면 학생들이 나와서 밥푸고, 국 떠서 먹곤했어. 내 생일때에는 케익사다 불켜고 노래도 불러주고, 학생들 졸업때는 가서 축하해주고 했는데… 다 옛 날 일이야.”





8,90년대 인하안경 대학상권 이끌어

8,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하대 후문 상권을 키운 것은 인하안경의 몫이 컸다. 당시 싸고 질좋은 안경을 파는 곳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안경을 하러 찾아왔다. 매장에 손님이 꽉차면 인근 찻집에서 티켓을 끊고 기다리게 했다. 전국에서 매출로 상위권을 기록할 정도였다. 

인하안경 한상복(46) 마이스터는 “90년대 인하안경에서 안경하고 회먹고 가면 서울에서 안경하는 값과 비슷하게 들었다”며 인하안경이 얼마나 쌌었는지 말한다.





인하대 후문의 명소는 당구장이었다. 수십 년간 영진당구장, 거북당구장 등은 인하대생들의 공강 시간을 메워주는 오락실이었다. 인하대생들은 우스갯소리로 ‘당구학점 300은 돼야 졸업한다’고 할 정도로 당구실력이 만만치 않았고, 당구장도 많았다. 지금은 그 많던 당구장도 하나둘 없어지고 장사도 옛날만큼 안 된다며 하소연 한다. 1,2층이 당구장이었던 건물들은 영진당구장을 빼곤 1층은 슈퍼와 은행에 내주고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45년간 당구장을 운영해 온 영진당구장 대표는 “요즘은 가게들이 학생들이 개강하고 한 달만 정신이 없어요. 학생들 학생회, 동아리 모임하는 동안만이에요. 그 기간 지나면 학생들이 없어요. 불황이라서 그래요. 게임비도 가위바위로 해서 각자 몇백원씩 나눠내는 형편이에요.”


싼 가격에 푸짐한 음식 차별화 된 메리트

인하대 후문 대학가 먹자골목의 강점은 가격이다. 푸짐한 음식에다 싼 가격이 메리트다. 부모에게 용돈을 타 쓰는 학생들을 위한 상인들의 배려다. 밥값 4천원선, 술값 1~2만원선이면 2~3명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인하대 동문들은 졸업 후나 결혼한 뒤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아 외식을 즐길 정도로 음식 값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모으는 큰 요인이다. 지금도 식당에 가면 밥은 무한리필이다. 이곳에서 20여 년간 식당을 운영한 한 상인은 “먹자골목이 너무 싸서 인하대생들은 이곳을 못 떠난다”고 말할 정도다.


인하대 문화의 거리 전성기는 2000년대 중반까지다. 경제호황과 맞물려 학생은 물론 시민들도 대학의 낭만을 만끽하기 위해 이곳을 즐겨 찾았다. 용현동 성당 언덕배기에서 중심상가 거리를 내려다보면 사람들로 꽉 메워져 머리만 보였을 정도였다. 


인하대 문화의 거리도 시대와 같이 흘러간다. 대자본을 앞세운 프랜차이즈점들이 1,2년 전부터 인하문화의 거리에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유명 커피전문점, 고기집, 치킨집, 화장품가게 등이 목좋은 상권을 차지했다. 프랜차이즈의 등장으로 가격은 다른곳과 같아졌고, 대학고유의 문화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구월동 로데오거리의 등장도 인하대 상권이 약해지는 데 한몫했다. 로데오거리가 생기면서 상권의 중심이 옮겨졌고 덩달아 젊은이들도 차츰 인하대 후문을 떠났다. 교통좋고 볼거리 많은 구월동으로 그들의 공간을 옮긴 것이다.


젊은 지성들의 토론과 고뇌가 묻어 있던 대학가. 그곳에서는 더 이상 막걸리를 마시며 민중가요를 부르지 않는다. 대신 영어로 쓰인 체인점 간판과 네온싸인들이 밤거리를 휘황찬란하게 장식한다. 그래도 인하대후문 대학가는 항상 엄마의 품처럼 푸근하다. 언제 어느때 다시와도 받아줄 만큼 넉넉하고 따듯함이 살아있다. 이런 정이 인하대 상권을 떠받치는 힘이다. 인정스러우면서, 살갑고 각박하지 않다. 때묻지 않은 젊은이들의 순수한 열정과 낭만, 지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인천의 유일한 대학가인 인하대 후문이 오늘도 이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