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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는 인천/여행·명소

인천의 고택 "그 집 처마와 대들보엔 깊은 이야기가 있다"



고택은 시간과 공간의 그윽한 파노라마다. 오래된 집엔 그 집과 함께한 사람들의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으며, 집주인의 숨결과 품결을 느낄 수 있다. 창틀, 문틈, 대문, 대청마루, 뒤뜰, 안방…. 집안 곳곳에는 살아온 사람들의 체취, 안목, 취향이 고스란히 배어 전해진다.


글 이용남 굿모닝인천 편집위원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강화도 황부자집


강화도 천석꾼의 집으로 알려진 황부자집. 집은 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에 위치한다. 이 집 대들보에는 1928년 7월 14일 새벽 4시 상량식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한여름의 뜨거운 뙤약볕을 피하고 새집에 상서로운 기운을 받고자 동트는 시각에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집은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가옥구조인 ‘ㄱ자’ 모양이다. 일제 강점기에 건축되어 전통 한옥과 일본식이 혼합되어 있다. 집에는 당시에 할 수 있는 모든 호사를 다 부렸다. 대들보와 서까래는 백두산 잣나무를 썼다. 당시만 해도 부자집들은 백두산에서 나무를 가져다 집을 지었다. 추운지방에서 자라 촘촘하고 짜임이 좋은 소나무류가 집을 짓는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집은 본채, 문간채, 사랑채,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집 구조와 내부는 집주인의 섬세하고 고급스런 안목과 취향이 그대로 녹아있다. 하나하나 짜 맞춘 창틀과 문틀, 특이한 문양의 마루, 문간 터짐 하나 없이 90여 년을 견뎠다. 당시로선 드물게 방문과 창문, 마루문에 한지와 유리를 함께 썼다. 유리는 일본에서 공수한 최신 스타일이었다. 햇볕 차단용 색유리로 근대 가옥의 분위기를 내고자 했던 흔적이 보인다.


황부자집은 당시 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집안이었다. 우리나라의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김구 선생을 지원했고, 1932년 강화에 전기를 끌어오는 데도 혁혁한 역할을 했다. 또 미래의 보석인 강화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강화군립유치원을 후원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1947년에는 김구 선생이 이 집에 와서 하루를 묵었다고 한다. 백범 일지에 의하면 김구 선생은 1903년 황부자집 인근에 살던 김주경씨 집에서 이 집 아이들을 3개월간 가르쳤다고 한다.


90여 년을 이어 온 이 집은 한 번도 주인이 바뀐적이 없다. 황부자로 불린 황국현씨의 부인이 1954년 갑오년에 사망한 후 관리인이 집을 지켜왔고, 2012년 12월에 도예가인 최성숙씨가 인수했다. 최씨는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집을 옛날 모습 그대로 보전해 옛 사람들의 생활을 보여 주는 ‘주생활 박물관’으로 만들 계획이다.





강화도 솔정리 고씨 가옥


넓직한 대지에 솟을대문이 집의 웅장함과 기품을 말한다. 강화도 송해면 솔정리 고씨 가옥은 솟을대문, 안채, 바깥채, 사랑채 등으로 구성된 ‘ㅁ‘자형의 반가형 99칸 가옥이다. 전통적인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을 혼합한 형태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2006년 인천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됐다.


이 집은 1941년 건립하였고 규모는 322.62㎡이다. 특징은 담장을 사고석으로 둘렀고 정면과 왼쪽, 오른쪽 3면에 문을 내었는데 정문은 1칸 규모의 솟을대문이다.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 트인 곳에 중정을 드나드는 출입구가 있다. 일본식 가옥처럼 행랑채 끝에 다실을 갖추고 있으며 건물 내부에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복도를 각각 별도로 마련해 놓았다. 집은 일꾼들이 지게로 흙을 날라다 땅을 고르게 펴느라 집터를 다지는 데만 4년이 걸렸다. 마당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불리는 가림벽이 있는 것도 이 고택의 특징이다. 우물, 빨래터가 있는 여자들의 공간을 남자들이 볼 수 없도록 만든 벽이다.


현재 이 집은 고재송 할아버지(83)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고씨 집안은 강화의 3대 부자집 중 하나였다. 고 할아버지에 의하면 강화엔 3대 부자가 있었다. 강화 홍씨, 김씨, 고씨 였다. 이중 홍씨네는 만석꾼이었고, 고씨집은 5천석꾼이었다. 고 할아버지의 선조들은 개성에서 장사로 큰돈을 벌어 강화도에 많은 땅을 샀다. 일제때는 양조장, 정미소, 직조공장을 운영하며 집안의 가세를 키웠다. 한 때는 이 집에 일꾼만 50명이 넘었다.


고 할아버지도 선조들의 영향을 받아 젊었을 때는 꽤 크게 장사를 했다. 강화 인삼을 재배해서 팔았고 강화 제일의 갑부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렇지만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듯이 할아버지는 80년대 들어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재산가로의 삶이 아닌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현재는 원로목사로 활동하며 고씨 가옥의 역사와 이야기를 깊이 간직하며 살고 있다. 





가좌동 심재갑씨 가옥


서구 가좌동에 300년이라는 세월의 풍상과 역사를 가슴에 넉넉히 품으며 온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택이 있다. 일명 심재갑 고택이라 불리는 이 집은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청송 심씨 10대손 심공 한웅(1652~1715)이 거주하면서 역사적 장소의 삶을 갖게 되었다. 그후 심공 한웅의 8대손인 심공 상필(1873~1957)과 그의 아들 심공 운섭(1899~1966)이 4년간 증축공사를 했다. 증축 공사가 끝나는 날에는 마을을 대표하는 기와집이 완성된 기쁨에 마을주민들이 모여 축하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증축 공사에 쓰인 나무는 백두산 소나무로 압록강을 거쳐 서해를 건너와 이 집의 대들보와 서까래로 자신들을 헌신했고, 기와는 영흥도에 있는 임경업 장군의 헐린 사당의 기와를 배로 운반해와 사용했다.


심재갑씨 집안은 지역의 유지로 나눔과 배품을 실천한 인천의 대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 가문이다. 심재갑씨의 아버지는 ‘늘 이웃에게 양보하고 배풀어라’를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래서 기와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심씨의 노력으로 마을에 첫 전기가 들어왔고, 전화기도 설치됐다. 전화기가 귀하던 시절, 마을사람들은 전화를 걸기 위해 심씨의 집 마당에 길게 줄을 서기도 했다.


심씨의 고택은 나그네들의 쉼터가 되어 주기도 했고, 1950년대에는 농촌계몽 운동의 하나였던 야학을 지도하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심재갑 고택은 2008년 재개발로 인해 헐릴 위기에 처했었다. 마을을 대표하는 귀중한 고택이 사라진다는 위기감에 마을사람들이 적극 반대에 나서면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집은 조만간 개보수에 들어갈 예정이다. 심재갑 선생(82)은 오래된 한옥집을 다니면서 고택 보수에 쓰일 기와를 모으고 있다. 





내동 월아천(月牙泉) 객주집


구한말 또는 일제때 물상 객주집이었다는 월아천. 지금은 한식집으로 쓰이고 있지만 집은 등기부 등본상으론 일제때인 대정 13년(1924년)에 건축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역 문화가들은 진짜 건축연도를 1890년대로 추측한다. 집은 전형적인 ‘ㅁ’형 한옥 구조다. 솟을대문과 중문이 있었고, 본채, 사랑채, 꽃담으로 이뤄지는 궁궐형태를 갖춘 예쁜 가옥이다. 집의 대들보와 서까래에 쓰인 나무는 황해도에서 체벌한 소나무다. 집을 세심하고 고급스럽게 지은 집주인의 안목이 느껴진다.


집의 고급스러움은 대들보의 굵기와 나무들의 둥근 곡선에서 드러난다. 문틀을 감싼 나무나 서까래와 대들보 색깔도 다른 집과는 틀린 격조를 보여준다. 못을 치지 않고 나무와 나무를 잇고, 엮은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2007년 집을 인수한 박정숙 사장은 이 집이 객주집 답게 방이 많은 편이었다고 한다. 안방을 빼곤 작은 평수의 손님방이 여럿 있었다. 집을 살 당시엔 서까래가 있는 천장에 덴조가 설치되어 있어 집의 역사적인 가치를 몰랐다. 식당으로 열기 위해 집을 개보수하면서 가려졌던 서까래와 집의 원형이 나왔고, 주변에서 횡재했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집을 수리하면서 바깥 벽쪽으로 1평도 안되는 비밀공간도 발견했다. 안채로는 연결이 안되고 바깥 창문으로만 나갈 수 있게 만든 숨은 공간이었다. 발견 당시 방바닥엔 화문석이 깔려있어 누군가를 숨겨주기 위한 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측했다. 이 집은 인천에서 큰 포목점을 한 이순영, 애관극장 주인이었던 정치국,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씨가 소유했었다. 월아천과 잇닿아 있는 옆 한옥도 객주집이었다. 이 집은 전형적인 객주집의 형태로 1,2평 짜리 작은 방이 8~9개나 되어 상거래는 물론 지방 상인들이 인천에 와서 묵어가던 곳이었다. 이 집의 특이점은 넓은 지하공간이다. 보통 한옥은 지하가 없는데 이 집은 방공호 형태의 커다란 지하공간이 있어 무궁무진한 상상을 하게 한다. 향토 전문가들은 이곳이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줬던 공간으로 봤다. 이 집과 월아천과는 담 없이 뒷 통로로 연결되어 있어 집 주인이 같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율목동 검은 기와집


율목동은 인천의 대표적인 한옥촌이었다. 이곳 한옥에는 인천의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2,30년 전만해도 이 골목 저 골목으로 한옥들이 이어져 있어 풍경 또한 아름다웠다. 율목동 245-9번지에 위치한 양재복(70)할머니의 한옥은 율목동에선 가장 오래된 집으로 손꼽힌다. 할머니는 이 집이 왜정때 지었다고 한다. 25년 전 이사한 양 할어머니는 당시 이 집을 동네사람들은 ‘부자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집은 전형적인 ‘ㅁ’자형이다. 대문이 있고, 중간대문, 안채, 바깥채, 사랑채로 이뤄졌다. 전 주인은 만물상을 운영했다고 한다.


집주인 양재복 할머니는 이 집에 이사 온 후 아들, 딸이 잘됐고, 집안일도 잘 풀렸다고 한다. 5년 전 집을 수리하면서 덴조를 설치해 지금은 서까래와 대들보를 볼 수 없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대들보는 자신의 양팔로 감싸도 남을 만큼 굵은 아름드리나무다. 할머니는 이 집을 살 때 남향인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편안하고 폭 안기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한다. 집은 내부수리와 바깥 차양만 공사를 했고, 대문과 지붕기와는 옛날 모습 그대로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모 방송사에서 오래된 집 촬영장소로 섭외가 들어온 적도 있다. 양 할머니는 집터 좋고 부자가 된다는 이 집에서 오래오래 살 계획이다. 부동산에서 집을 팔라고 여러 번 제의가 왔지만 거절했다. 자식들 하는 일 잘되고 마음편하게 잘 살고 있는게 이 집 덕분이라는 생각에 집을 더 아끼고 보듬으며 살고 싶다.


자료 : 굿모인 인천(http://goodmorning.incheon.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