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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문화마을 골목 탐방기 우각로 '신여성길'

 

배다리문화마을 골목 탐방기

우각로 '신여성길'


우각로 '신여성길'
우각로 '신여성길'에는 개항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을 통해 신식교육이 이루어지면서, 여자아이들의 교육도 시작되었는데, 그 발상지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였던 '영화초등학교 본관동 영화학당 건물'이 이 곳에 있다.

 

 

 

 

영화초등학교 본관동 영화학당 건물
1892년에 설립된 영화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로 우리나라 신교육 발상지로 기록되고 있다. 개신교 목사로는 처음으로 1885년 4월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H.G. Appenzeller) 목사가 같은 해 7월 19일 공중예배를 봄으로서 인천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를 세우게 된다. 아펜젤러가 세운 배제학당에서 교사를 겸하다 아펜젤러에 이어 내리교회 운영을 맡은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hns) 목사와 벤젤(M.J. Bengel) 여사(1893년 존스 목사와 결혼)가 1892년 3월 지금의 내리교회 구내에서 강재형 전도사 부부와 함께 남자 어린이 3명와 여자 어린이 2명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존스 목사와 강재형은 남학생을 맡았으며, 여학생 학급은 벤젤과 강재형의 부인이 담당했는데, 이들은 1894년에 학교 건물을 세우고 교명을 영화학당이라 했다.
이후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학생수가 늘어 영화 남학당은 1904년 미국의 자선사업가인 콜린스(Mr. Collins, E.S.)로부터 천 달러를 기부 받아 그 해 11월 경동 싸리재에 벽돌집 교사를 신축해 이전하였고 교과목도 늘어났다. 광복 후 인천영화국민학교로 개칭하여 그 전통을 이어왔으나 운영난으로 1970년 5월 문을 닫았다.
영화여학당은 1900년 4월 2일 내리교회 뒷방을 임시교사로 얻어 이전했다가 1902년 미국인 카루렌의 기부금으로 경동 131번지(1973년 당시 지번)에 벽돌조 교사를 신축했으며, 운동장도 마련하여 1903년 9월 30일에 학교를 이전했다. 이후 카루렌이 다시 기부하여 1909년 금창동 현재의 자리에 학교부지를 구입하고 1910년에 강화와 부평 지역의 여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여학생 기숙사를 완공했고, 1910년 3월 2층 벽돌집 교사를 착공하여 1911년 9월에 준공, 이전하였다. 곧이어 1913년에는 숙원이던 강당까지 건립해 명실상부한 인천의 명문교로 발돋음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22년 9월에 영화여자보통학교로, 1941년 4월에는 영화여자국민학교로 인가받았다. 1966년 3월에는 샛별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나 1973년 10월 영화국민학교로, 1996년 영화초등학교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64년에는 학교법인 영화학원 설립 인가를 받은 이후 1966년에는 영화여자실업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개교를 하게 되었고, 2000년에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로, 2012년에는 현재의 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유니폼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한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박사였던 김활란, 유아교육의 개척자 서은숙, 여성교육학자 김애마, 영화배우 황정순 등이 있다.
현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옛 여선교사 기숙사

 

 

 인천세무서(옛 남선교사 기숙사)


옛 여선교사 기숙사
영화초등학교 옆에는 '옛 여선교사 기숙사'가 자리하고 있다. 감리교 남선교사들이 지내던 현재의 인천세무서 자리 바로 옆에 위치한 이 곳은 1897년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현 인천세무서 뒤편 언덕에 선교사 아펜젤러 사택인 에즈베리 목사관을 세웠는데, 1902년 화재사건으로 소실되고, 1904년 소실된 에즈베리 예배당을 대신하여 목사관을 다시 건축하고, 이어 여선교사 기숙사를 건축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해안이 봉쇄되면서 여선교사들은 제물포를 비롯한 인천지역 선교사업에 집중했는데, 이 와중에 여선교사들이 3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들은 당시 조선인이 살던 전통가옥을 개조하여 거주하고 있었지만, 서양가옥에 익숙한 선교사들은 편안하고, 안정된 거주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05년 여선교사들을 파송한 겜블 부인(Mrs. Gamble)의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여선교사용 기숙사를 건축하게 된다. 한편, 이와 더불어 바로 위쪽(현 인천세무서 주차장 자리)에 남선교사 기숙사를 건축하였다.
이 건물은 헤스목사가 추방당할 때까지 거주했으며, 이후 제물포성경구랍부, 지방회사무실로 사용하였다. 해방 후에는 미군 방첩대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1949년에는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문을 열었다. 1950년 한국 전쟁 시에는 미국 첩보대사무실로 사용했으며, 바로 옆 영화학교 본관동은 미해병대 첩보대로 부역자 적격심사를 해서 옆에 있는 창영초교 본관동에 있던 경기도 경찰서 임시청사에서 처리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창영초등학교 건물에 총자국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후 1956년부터는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사용하다가 창영교회서 매입하여 현재는 사회복지관 교육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7년 우각로 공공미술프로젝트를 비롯한 각종 공동체예술프로그램을 주민들과 함께 진행했던 '퍼포먼스 반지하'


창영초등학교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는 순수민족자본으로 건립되었다. 1907년 4월 1일에 발포된 보통학교령에 따라 1907년 5월 6일 관립 인천일어학교 교실 하나를 빌려 학생을 모집했는데, 개교 당시 학생 수는 3명이었다. 설립 초기 학생들의 연령은 5세부터 25세까지 다양했는데, 제1회 졸업식은 1910년 3월 26일 열려 18명의 졸업생이 처음으로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이후 제령학교를 병합했고 1907년 12월 9일 교사를 신축하여 현재의 위치인 창영동으로 이전했다. 현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영초등학교가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3·1운동 당시 인천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되어 당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이다 투옥되는 등 격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역사상으로도 교육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부터는 동구청 주관으로 3·1절 기념식 및 만세운동 제현행사가 실시되고 있으며 올해에도 행사를 갖을 예정이라고 한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길을 따라 오르면 '달팽이 길'이라고 하는 좁은 지름길이 나온다. 벽화로 꾸며진 벽을 따라 오르면 어느새 '달과 가장 가까운 동네'라던 달동네에 다다른다. 브라운관을 통해 보여지던 당시 달동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신여성길의 끝을 장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