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꿈’을 창조하는 사람들
숭의동 목공예 거리
숭의동. 길옆에 늘어선 간판을 읽는다. 원목, 인일, 한일…. 나무와 평생을 지내온 30여개의 목공예점과 목공소들이 모여 ‘목공예 거리’를 이루었다. 간판 이름은 달라도 이곳 주인장들의 사는 모습은 서로 닮아 있다. 30~40년은 기본으로 외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발길 닿는 데로 불쑥 찾아가 그들이 펼쳐놓은 삶의 무늬를 들여다보았다.
한일공예사(대표 김종필.51)에 들어서자 잘 다듬어진 나무 의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김종필 씨의 작품이다. 그는 집성목을 이용해 생활가구를 만든다. 군 제대이후 목공소와 인연을 맺었으니 벌써 28년째다. “군함 모형을 만들어 재료 상에 가져갔는데 그것을 본 사장님이 바로 출근하라 하더군요. 목공에 관한 일은 그곳에서 거의 다 배운 셈이에요.”
찬찬히 둘러보니 먼지에 둘러싸인 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차화만기’. ‘차를 마실 땐 빈 마음으로 편하게 마시란 뜻’이라고 김 씨가 일러준다. 푸른색 글자로 세긴 이 현판은 20여 년 전 서각을 배우면서 걸어놓은 것이라고 했다. 서체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김 씨가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콘솔 도안이라는데 그림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구상과정이 가장 중요하죠. 그 다음은 밑그림 이예요. 손님은 그림을 본 이후에 물건 구매여부를 결정짓거든요.”
이젠 손에 익을 대로 익어 소품이나 간판은 물론 예쁜 스넥바나 진열장 등 웬만한 건 다 만들 수 있지만 삶의 무게는 그리 녹녹치 않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일을 놓을 생각은 없다. “손님이 물건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어요?”라며 그가 웃는다.
진교욱(인일조각.63)씨는 나무를 이용해 간판을 만든다. 40여년 가까이 목간판 글씨에 꿈을 실었다. 학창시절에는 그림을 잘 그렸고 글씨는 취미로 배웠는데 어느새 직업이 되어 있었다.
진씨는 “크게 자랑할 것은 없어요”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가 보여준 앨범 속에는 작업했던 결과물이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공공기관의 목 간판 중 그의 손을 빌리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진 씨는 그 중 강화도 충렬사에 놓인 유적지 안내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전부 수작업인데다 유적지를 찾는 이에게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가치 있는 작업물이란 생각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해오면서도 그는 “영업은 단 0.1%도 해보지 않았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순전히 입소문이 그의 영업을 도왔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무를 다듬어 건조시킨 이후 작업이 끝날 때까지 수십 번의 손길을 거쳐야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대충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무조건 제 마음에 들어야 손님에게 내줍니다. 빨리 넘기고 돈 받는 데에만 급급 하는 것은 상도덕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죠.”
수공업자이다 보니 나라에서 인정해 주는 명장 타이틀은 없지만 일에 대해 쌓아온 그의 경험과 신념은 명장 못지않게 깊어 보였다.
다시 발길을 옮겨 두리번거린다. 순간 아기자기한 공예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목공예방 원목(대표 김명일.60)으로 들어가니 김명일 씨가 나무판위에서 꽃잎을 도려내고 있다. 벽걸이 시계에 들어갈 장식용 꽃이란다. 김씨는 대량 생산을 위한 공예품의 원형이나 생활 공예품을 만들어 유통업체에 제공하고 있다.
42년이란 긴 세월에 일이 싫증날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일이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라고 표현했다. 일 자체가 자유롭고 창조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전성기에서 익산 금산사 복원작업은 빼놓을 수 없다.
“3년 정도 작업했죠. 목불상과 불에 탄 절을 복원하는 일에 참여했어요. 그 일로 집도 마련했으니 전성기라 할 만하죠?”라며 그가 기억 한 자락을 끄집어냈다. 그러나 생에서 어찌 달콤함만 있을 수 있을까? 그도 초창기에는 작업하던 손에 수 십 번 상처를 내야했다. 험하고 먼 길 끝에서야 오롯한 작품 하나가 탄생되었다. 그 작품들로 각종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수 십 차례 수상도 했으나 이젠 상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로지 작품에만 마음을 두겠다는 그의 의지다. 그의 손끝에서 조각칼에 밀린 나무 조각들이 꽃잎처럼 살포시 내려앉는다.
공예 거리를 등지고 돌아서자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들어간 마지막 장소 고전공예사(대표 강오원.61). 주인 강오원 씨는 목공예거리협회 회장이라고 했다. 회장으로서 그는 양성할 후배가 없다는 점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가르쳐 주고 싶어도 배울 사람이 없어요. 다행히 구에서 목공예 거리 뒤편에 공예 체험장을 만든다고 하니 기대감이 큽니다.”
강 씨는 시간이 흐르며 가져온 변화를 곱씹듯 말했다. “한때는 10명이 넘는 직원을 두는 호사도 누리고 또 어느 때는 일하다 다쳐서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욕심도 체념도 지난 일이죠. 그저 평생 해오던 일이니까 그 뚝심 하나로 목공예 일을 지켜나가려고요.”
목공예 거리에서 어떤 이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어떤 이는 하릴없이 다치기도 하지만 이곳이야말로 진지함이 배어 있는 숭고한 일터다. 그래서 삶의 무늬결이 곱다. 돌아서는 길.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길 위의 통나무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음, 장인의 손길을 거치면 조만간 너도 새로운 얼굴을 내밀겠구나.’
김지숙 객원기자 jisukk@hanmail.net
자료 : 인천시 인터넷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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