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얄개들의 천국
제물포고, 인일여고, 인천여고, 인성여고, 인천여중, 상인천여중, 인성여중, 축현초등학교. 인현동 일대에 있던 학교들이다. 이렇게 많은 학교가 반경 300m 이내에 오밀조밀하게 자리잡고 있는 예는 우리나라에서는 전무후무했다. 7,80년대 등하교 시간에 이곳은 마치 거대한 펭귄떼가 이동하는 모습을 연상시킬 만큼 온통 교복 입은 학생들뿐이었다.
그러나보니 학생들과 관계된 사업이 번창했다.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대형문구점과 체육사를 비롯해 화방, 학원, 탁구장, 사진관, 분식집 등이 성업을 이뤘다. 굳이 나누자면 용동마루턱을 넘어 신포동과 경동은 ‘꼰대’들의 공간이요. 인현동은 ‘얄개’들의 천국이었다.
이제는 미국 LA까지 진출해 당당히 한식의 한 메뉴로 자리 잡고 있는 쫄면의 고향이라고 할 만큼 분식집은 한집 걸러 하나씩 있었다. 명물당, 만복당, 맛나당 등 ‘당’자 돌림의 분식집은 먹성 좋은 얄개들의 방앗간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 199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개발에 의해 한두 학교가 교외로 터전을 옮기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남은 학교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점차 주변 상가도 예전만큼 활기를 띠지 못했다.
이 지역이 쇠락의 결정타를 맞은 것은 ‘화재사건’이었다. 1999년 10월30일 저녁 인현동 분식 골목에 위치한 상가건물 1층 노래방에서 내부수리 중 화재가 발생해 2층과 3층 호프집으로 불이 번져 그곳에 있던 10대 청소년 등 50여명의 귀중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유증으로 이 지역은 한동안 인적이 끊기며 적막감마저 돌기도 했다.
화재 발생 10년, 화상은 어느 정도 치유가 되었고 축현초등학교 자리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이 들어서면서 청소년들의 재기발랄한 발길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인천 인현동_40년 이상 된 기술학교
인천 인현동_마치 세트장을 걷는 듯한 공원오르는 길
인천 인현동_모찌 만드는 전동 떡집(좌), 버스표 가게의 진화(우)
인천 인현동_수퍼(super)스럽지 않은 슈퍼
인천 인현동_예전에 인천에서 가장 큰 탁구장이었던 곳
# ‘별’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드나들던 별제과
서울에 종로서적이 있었다면 인천엔 대한서림이 있다. 7,80년대 젊은이들의 모임은 책방 앞에서 먼저 만나 장소를 옮기는 아날로그식 만남이었다. 동인천 지하상가 출입구 바로 앞에 있고, 전철역에서 내리면 한 눈에 보이던 5층 건물 대한서림은 인천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이자 랜드마크였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대한서림에서 일단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무슨 사정인지 끝내 나타나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며 읽은 책이 짧게는 시집이요 길게는 소설이었다.
대한서림이 문을 연지 어언 56년. 우리나라 책방 역사에 쉽지 않은 세월이다. 인천의 7080세대들은 이 책방에서 ‘씨알의 소리’ ‘해방 전후사의 인식’ 같은 돌베게 마냥 묵직한 책을 구해 읽기도 했고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달콤한 책을 읽으며 사랑을 꿈꿔왔다.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며 반백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대한서림은 결코 외롭지 않다. 바로 앞에 있는 동인서관도 함께 시간을 했기 때문이다. 인천에 이런 서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현재 대한서림이 있는 건물은 원래 별제과 건물이었다. 별제과는 결혼을 앞둔 양가부모의 격식있는 상견례 자리였을 만큼 70년대 당시 인천 최고의 ‘럭셔리’ 양과점이었다. 말 그대로 이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별’처럼 보이던 시절이었다. 이 건물에는 ‘별’ 음악감상실도 있어 음악을 통해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이던 젊은이들의 발길로 문턱이 닳았다. 한때 문인들이 시낭송회를 개최하는 등 별제과 건물은 동인천 문화예술의 한 공간을 담당하기도 했다.
인천 인현동_대한서림
인천 인현동_대한서림 주변
인천 인현동_폐허가 된 일본주텍
# 새 학용품을 확보하라
인천에 백화점이 없던 시절, ‘학생백화점’이란 간판을 내걸고 학생들의 ‘해방공간’ 역할을 했던 곳이 대동학생백화점이다. 1층에는 문구점과 화방, 체육사 그리고 2층에는 DJ가 있는 분식집으로 구성된 복합 건물이었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숍 인 숍’의 형태였다. 아직도 ‘대동학생백화점’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지금은 1층에 문구점과 화방만 운영하고 있다. 50년 역사를 지닌 이곳은 1년 내내 학생들로 늘 붐볐지만 특히 3월 신학기를 앞둔 며칠 전부터 학용품과 체육복을 새로 구입하기 위해 몰려든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치 포도주 매니아가 보졸레 누보를 손꼽아 기다리듯이 신학기가 되면 올리비아 핫세 같은 외국배우의 사진이 새겨진 새스타일의 학용품을 먼저 확보하기 위해 아침 일찍 백화점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쳤다. 한창 때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입장할 수가 있었는데 그 줄의 꼬리가 50m는 예사였다. 전쟁을 치르듯 어렵게 물건을 확보한 학생들은 2층으로 올라가 DJ가 들려주는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학용품을 사고 남은 우수리 돈으로 분식을 시켜 먹으며 서로 그날의 전리품을 내놓고 자랑하며 뿌듯해하곤 했다.
학교도 많이 떠났고 학생수도 줄었지만 대동백화점 아래쪽으로는 아직도 여러 개의 체육사와 문구점 그리고 화방이 그대로 남아있어 이곳에 오면 학창시절 깔깔대며 이 거리를 거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인천 인현동_1970년대 초반에 오픈한 대동학생백화점(좌), 일본식 주택의 성형(우)
인천 인현동_자유공원가는 길
인천 인현동_구멍가게의 흔적
# 진공관 시대의 전업사들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던 서울의 세운상가. 잠수함은 아니더라도 소형 헬리콥터 정도는 만들 수 있었던 곳이 인현동 전자상가이다. 일제강점기 때 양조장 건물이었던 빨간 벽돌건물 안팍과 축현학교의 긴담을 기댄 크고 작은 전파상과 조명가게 그리고 전업사가 오밀조밀하게 늘어서있던 이 동네도 진공관 시대를 거쳐 IC 그리고 IT 시대에 오면서 외관부터 많이 변했다.
한때 한 평이 채 안된 가게부터 2층짜리 번듯한 건물 등 30개 넘던 상점도 열개 남짓으로 줄어들었고 남아있는 가게들도 손님들의 발길을 끊겨 그저 셔터만 올려놓은 상태이다. ‘우주전자’ ‘대륙전자’ 같은 상호처럼 80년대 중반 대륙을 꿈꾸고 우주를 꿈꾸며 벤처정신으로 무장하고 이곳을 제집 드나들듯했던 그 공학도와 기술자들은 자신의 꿈을 이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인천 인현동_동인천 전자상가
인천 인현동_연립주택을 떠받치고 있는 오래된 축대(좌), 인천에 몇개 남지 않은 나무전봇대(우)
# 삼치 굽는 마을
인현동에서 전국구의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은 삼치거리이다. 학생교육문화회관 뒷길은 매일 저녁 고소한 삼치구이 냄새가 진동한다. 이 골목길이 삼치거리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인하의 집'이 현재의 자리에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삼치와 막걸리를 팔면서 부터다.
원래 이곳에는 후에 ‘소성주’라는 인천막걸리의 토대가 된 대화주조라는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에 술은 자연스럽게 막걸리가 나왔고 안주로는 인근 부두에서 싼 값에 팔리는 삼치를 튀겨 내놓았다. 이후 한두 집씩 삼치를 곁들인 막걸리집이 들어서더니 지금은 14개 업소가 성업 중이다. 업소마다 기름에 튀기거나 그릴에 굽는 등 제각각 다른 독특한 맛으로 손님들을 끌고 있는데 어느 집이든 어른 손바닥보다 큰 삼치를 2∼3토막씩 한 접시에 푸짐하게 담고 있다.
이 곳은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이 삼치와 막걸리로 저녁을 대신하면서 개똥철학을 설파하고 시국을 논했던 곳이다. 세월이 지나 이제 중년이 된 그들은 이 골목을 다시 찾아 그 시절의 향수에 젖곤 한다. 막걸리 열풍 덕분에 다시 이 거리가 조명받기 시작했다. 3∼4명이 마음껏 먹어도 1만∼2만원이면 충분할 정도로 세월이 흘러도 서민적 분위기는 여전한 곳이다.
인심과 맛은 바뀌지 않았어도 거리와 건물의 외관은 많이 바뀌었다. 2001년 10월에 이 거리는 '동인천 삼치거리'로 지정되었고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간판과 외벽을 치장하기 시작했다. 인테리어, 화가 등의 손길을 거치면서 모든 가게의 간판이 ‘작품’으로 거듭났다. 이제는 삼치 맛 못지않게 이 거리는 간판구경 코스가 되었다. 심심치 않게 방송을 타거나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피사체가 되고 있으며 관련자들의 탐방코스가 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인천 인현동_삼치거리
인천 인현동_전동삼치거리(좌), 전동삼치(우)
인천 인현동_삼치가게 위에 묘한 벽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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