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쌀로 흥(興)한 동네
밤나무 마을 율목동이 부자 동네가 된 것은 ‘쌀’ 때문이었다. 1906년 농상공부 허가 쌀 중개업체인 근업소(勤業所)가 율목동 55번지에 문을 열면서 부자 동네가 되었다. 여주, 이천 등 전국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역할을 하는 인천근업소 주변에 사람과 돈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로 영남 출신 상인들이 미곡중개를 주름 잡았는데 업무상 일본어 능통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쌀장사로 돈을 번 그들은 근업소 근처에 단아한 자태의 한옥을 지어 살면서 ‘밤나무골 새동네’로 불리웠다.
4, 50대들에게 율목동 하면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는 ‘율목풀장’이다. 노천 풀장이었던 율목풀장은 옛 시립도서관 뒤편에 있는 현재의 어린이공원 자리에 있었다. 이 터는 우여곡절이 참 많은 곳이다. 1900년대 초반까지 인가가 거의 없던 이 언덕배기는 원래는 일제로부터 자작 벼슬을 받고 법부대신을 지낸 이하영 소유의 임야였다.
이곳에 일본인들이 9천여㎡의 공동묘지를 조성해 시내 곳곳에 퍼져있던 자국민들의 묘지를 이장해 만들었다. 일설에 의하면 묘지 상당수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본군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서 멀지 않은 곳에는 화장장도 있었다, 이 화장터는 1930년대에 도원동으로 이사를 갔고 1944년 공원으로 결정되었지만 ‘사자(死者)의 땅’으로 인식돼 한동안 인적이 드문 야산으로 남아있었다.
뼈가 나뒹굴던 산꼭대기 땅은 1970년 12월 '풀장'으로, 그야말로 환골탈태하면서 인천의 명소가 되었다. 딱히 휴가와 레저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율목풀장 한번 다녀 온 꼬마는 동네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땅은 1992년 다시 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1997년 공원 조성공사를 하던 중 땅속에서 귀와 목이 잘린 문인석 6점이 거꾸로 매장된 것을 발굴했다. 일제가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저지른 행위였을 것이라는 게 당시 추측이었다. 그중 3개의 문인석이 현재 율목공원 맨 위쪽에 전시돼 있다.
# 한옥과 일본집의 조화
율목동 하면 시립도서관을 빼놓을 수 없다.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1946년 현재의 자리에 문을 연 옛 시립도서관에 대한 추억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좌석을 잡기 위해 새벽 공기를 헤치고 싸리재를 거쳐 성산교회 앞 언덕을 숨 가쁘게 올라가던 일. 발걸음을 뗄 때 마다 삐걱거리던 구관 목조 계단. 양지바른 신관 앞 벤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었던 소설책들. 이제 그 도서관은 추억을 머금은 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시립도서관은 미추홀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남동구에 새롭게 터전을 마련했다.
현재는 ‘율목도서관’이란 간판을 새로 걸었다. 도서관을 둘러봤다. 먼저 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나라 건물 구조와는 사뭇 다른 목조 이층집이 도서관 마당 끝에 자리잡고 있다. 아직도 목조계단과 유리창의 모양 등은 옛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 옆에는 일본식 정원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분수연못과 여러 개의 석등이 세워져 있다.
이 집의 옛 주인은 '역무 정미소'로 이름을 날렸던 정미업자 리끼다께(力武平八). 정미소로 떼돈을 번 그는 전망 좋기로 소문난 이곳에 정원이 딸린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는 정원의 석등에 불을 켜놓고 일본 정미업자들과 함께 항구와 신흥동 정미소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내려다보며 밤새 흥청망청 연회를 벌였으리라.
1962년 준공했던 2층짜리 신관 옥상에 올랐다. 사방팔방으로 시야가 트였다. 월미도, 인천대교, 수도국산, 수봉산, 청량산, 계양산… 아파트가 없던 시절, 전망 하나로만으로도 이 동네에 사는 맛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밑으로 일본집들의 지붕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율목동은 산을 중심으로 북동쪽 은 한옥동네, 서남쪽은 일본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옥이 있었던 곳은 거의 빌라가 들어섰지만 아직도 반대편은 왜식풍의 주택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일본동네의 분위기가 물신 난다.
이곳에는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문화주택이라고 부르며 지었던, 남향으로 넓은 창을 낸 작고 아담한 이층집들이 많이 남아있다. 얼마 전 까지 만해도 인근에 ‘다다미방’ 수리 가게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걸로 봐서 이제는 많은 집들이 외관만 왜색풍이지 내부는 현대식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끔 그 골목에서 사진기를 든 허리 구부정한 백발의 노신사를 만난다면 그는 일제강점기에 '진센(인천의 일본어 음)'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패전 후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 슬픈 사연 깔린 긴담모퉁이 길
일본집 많은 동네에서 답동성당 쪽으로 가면 '긴담모퉁이 길'이 나온다. 돌담이 길게 놓여진 이 길은 애초에는 꼬불꼬불한 실오라기 산길이었는데 홍예문을 만들었던 일본 공병대가 1907년에 구릉을 헤치고 축대를 쌓아 '신작로'를 만들었다. 신흥동 지역에 살았던 일본인들이 축현역(현 동인천역)과 경인가도로 편하게 다니기 위해 만든 지름길이었다. 화수동, 송현동 등에 살던 젊은 아낙네들이 하얀 머리수건을 쓰고 신흥동 정미소로 줄지어 일하러 가던 슬픈 사연을 지닌 길이기도 하다.
길게 늘어진 돌담 끝, 신흥동 쪽으로 가면 케이크 조각처럼 잘린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신기해서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수퍼가게 문을 열고 한 할머니가 나오며 언잖은 표정을 짓는다. 사연인즉 우마차 정도 드나들던 긴담모퉁이길이 조금씩 확장되더니 급기야 할머니 집의 거의 대부분이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율목동은 6,70년대 청춘남녀의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다. ‘인도집’이라 불린 유명한 도나스(도너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병원 옆 골목에 있던 인천도나스집은 70년 대 초까지 '얄개'들의 연애 장소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곳이다. 교외지도담당 선생님들이 가끔 들러볼 정도로 '문제의 장소'이기도 했다. 연인들은 도나스를 달콤하게 먹고 나서 인적이 드문 ‘인천의 몽마르트 언덕’ 율목공원으로 장소를 옮겨 도나스보다도 더 달콤한 데이트를 즐겼다.
율목동 골목에서는 무궁무진한 인물들의 사연이 읽혀진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맹인들의 세종대왕’ 송암 박두성이다. 강화 교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강점기에 한글 점자를 창안하고 시각장애인 교육에 평생을 바치며 암흑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었던 인물이다.
송암이 언제부터 율목동에 살았는지 모르지만 1935년 인천영화학교 교장에 부임하던 시절부터 1963년 8월 25일 76세의 일기로 별세할 때 까지 율목동 25-1번지에 거주했다. 그는 대문에 커다란 태극문양을 그려 넣어 동네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에게 자신의 집을 쉽게 알려 줄 수 있도록 했다.
원래 7칸 방이 있을 만큼 컸던 그 집은 현재 도로와 상가 등으로 잘려나갔고 아무런 표식이 없어 오래 된 듯한 기와만이 그 집의 연조를 말해주고 있다. 한동안 대문 앞에 세워져 있던 표지석은 현재 율목공원에 놓여져 있다.
이밖에 인천부윤(현 시장) 관사, 기독병원, 경아대 등 율목동은 인천역사의 작은 내러티브가 더덕더덕 붙어 있는 다채로운 콜라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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