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그의 손에서 용이 되고 범이 되고 학이 되다
30년 외길 인생 걸어 온 조각공예가 이철환씨
폼나는 대형 나무 조각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상징이다. 아마도 나무토막을 예술로 만들어 낸 노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두 해 배운 솜씨로는 감히 명함도 못 내민다는 조각공예의 세계를 용현동 군자 조각공예사 이철환씨를 통해 들여다봤다.
화가가 꿈이었던 소년, 생활 공예인이 되다
50여 년 전 그림을 썩 잘 그리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당연히 자신의 재능을 살려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려웠던 시절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는 자신의 꿈을 고집할 수 없었다. 청년이 된 소년은 자신의 재능도 살리고 돈도 벌 수 있는 타협점을 생각했다. 그 타협점은 나무를 조각하는 일이었다.
“그때는 숭의동에 목공예소가 많았어요. 일 좀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 일단 찾아갔죠. 그런데 그 많은 곳 중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러다 제일 늦게까지 일을 하는 곳으로 들어갔어요.” 30여 년 전 이철환씨의 목공예 입문 과정이다. 늦게까지 일을 하는 곳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그는 “그만큼 일이 많다는 거 아니겠어요. 일이 많고 바쁘니까 초보를 써 줄 확률도 높을 거라고 생각했죠.”라고 답했다.
영리한 판단과 타고난 손재주 덕에 그의 목공예사 인생은 쉽게 풀렸다. 예상대로 그가 찾아 들어간 곳은 일감이 많았다. 그리고 일감이 많다는 것은 그곳 사장님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손님이 인정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르고 찾아간 곳이었지만 이철환씨는 그렇게 솜씨 좋은 사장님을 만나 자신의 재능을 맘껏 뽐내며 성실하게 일했고 주변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들보다 빠른 성장에 그만 자만심도 생겼다. 3년 차에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며 독립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래도 그는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실패를 거울삼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고, 그 후로도 그는 지금까지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용을 만들고 범을 만들고 학을 만들고 있다.
공구와 조각도도 직접 만들어 사용
예술 중에서 가장 위험이 따르는 분야가 조각이 아닐까 싶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길이 잘 든 조각도가 자신을 향하는 흉기가 될 수도 있고, 전기톱이나 전동 드릴 등을 사용하다 보면 언제나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그 오랜 세월 사고 한 번 없이 상처 하나 없이 작업을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철환씨에게도 이제는 훈장처럼 돼버린 크고 작은 상처들이 온 몸에 남아있다. 하마터면 팔을 절단해야 할 정도로 큰 위기를 주었던 깊은 상처도 있다. “전기톱이 스쳐서 팔이 두 동강 날 뻔 했었죠. 2달 넘게 입원했고 퇴원 한 후로도 다시는 이 일을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조각은커녕 나무를 들어서 옮기는 것도 힘에 부쳤거든요. 그래도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그의 말에서 부상투혼의 운동선수와 다를 바 없는 열정이 느껴졌다.
이철환씨는 원목을 구해오는 일부터 작품을 구상하고 나무를 다듬고 조각하고 여러 번 칠을 하는 모든 과정을 혼자서 처리한다. 일에 필요한 도구들을 자신의 손에 맞게 직접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직접 만든 조각도는 20년이 넘게 사용해 오고 있다.
그의 조각 솜씨에 감탄하며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오랫동안 해 온 일이라 이제는 조각하는 데는 별로 시간 많이 안 걸려요. 길어야 2주일 정도. 짧으면 반나절에 끝나는 것도 있고요. 오히려 구상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말리는 데 시간이 걸리죠. 조각하기 전에도 나무를 오랫동안 말려 놓고, 또 칠을 한 번만 하는 게 아니거든요. 조각 한 다음에 칠하고 말리고 또 칠하고 말리고 여러 번 반복해야 해요. 그래서 나무토막에서 완벽한 상품이 되기까지 4년 이상 걸리는 것들도 있습니다.”
가장 맘에 드는 작품 좀 보여 달라고 하자 그는 “내 맘에 드는 물건이 나오면 이 일 그만 둬야지. 이것도 예술이에요. 예술가는 전작보다 좀 더 나은 작품 만들려고 계속하는 거거든. 만들 때는 최선을 다해 만들었어도 만들어 놓고 보면 또 부족한 부분이 보이거든요.”라고 말했다.
먼지와 소음을 감수해야 하는 환경에, 위험이 따르는 작업 과정. 뒤를 잇겠다는 후배도 없는 상황. 그리고 그 무엇보다 예술가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도 그가 정직한 땀방울을 흘리며 조각을 계속한 이유를 짐작케 해 주는 대답이었다.
유수경 객원기자 with0610@hanmail.net
자료 : 인천시 인터넷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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