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이어 온 농익은 복국
'송미정'의 복 중탕
글 김윤식 시인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취한 다음날은 으레 연수구나 남구 쪽 국밥집으로 나가 속을 풀곤 했는데 그날은 배다리 송미정(松味亭)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아주 오랜만에 술에 다친 속을 편안하게 다독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송미정에를 가게 되었다.”는 어투가 되고 만 것은 그동안 이 집을 전혀 기억 속에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구세(區勢)가 쇠퇴하면서 내로라하던 음식점들마저 다 타처로 떠나간 터라 이 집 역시 머릿속에서 저절로 그렇게 치부되고 있었는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날 아주 우연히 송미정에 들렀다. 그 우연은 기실 전날의 객기에 연관한다. 봄날의 갈피를 못 잡은 주광(酒狂) 셋이서 전날 밤새 주정(酒井)에 빠져 있었던 것.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각자 숙소로 퇴각했는데 고작 서너 시간 눈을 붙였을까. 이쪽보다는 훨씬 체력이 좋은 후배 하나가 일찍 깨어나 해장을 하자고 전화를 한 것이다.
다친 속 풀어주는데 된장 푼 중탕 제격
외지 출신인 그가 택시를 타고 다시 내 쪽으로 오는 도중 우연히 기사로부터 들은 바가 바로 송미정의 복국이었다. 도착 전에 그는 한 번 더 내게 전화를 해 기사로부터 들은 송미정을 물었고, 나는 그때 문득 잊고 있었던 이 반가운 상호를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숙취에 절은 몸을 이끌고 실로 오랜만에 가 앉았던 것이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참으로 고즈넉한 기분까지 느꼈다.
토요일 오전, 아직 손님이 뜸해서인지 주방 남자가 직접 들어와 우리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중탕을 권했다. 그냥 앉아 있으면서도 진땀을 흘릴 듯한 이런 사람들에게는 매운탕보다도, 또 ‘지리’보다도, 적당히 된장을 풀어 끓인 중탕을 내는 게 적합할 것이다. 매운탕은 칼칼해서 입에는 괜찮은데 다친 속에는 다소 부담이 간다. 지리는 소화기의 기력이 크게 쇠잔한 경우가 아니라면 좀 심심하다.
넓적한 냄비 속에서 데쳐진 미나리, 쑥갓을 우선 건져 먹고 뒤따라 푹 우러난 국물을 몇 숟가락 들이켜니 이내 몸이 ‘활짝 풀리고’ 속이 누그러진다. ‘풀린다’는 표현은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께서 생전에 집필하신 <인천근해 어물세시기> 중에 복어에 대한 설명 대목에서 나온다. “요즘 대중식사로 잔 복으로 끓인 매운탕이 성행하고 있다. 구수한 복찌개 한 그릇이면 몸이 활짝 풀린다고 한다.”
시원한 복국의 마력을 한마디로 참 간결하게 표현하셨다. 예전엔 이런 국물을 신포동과 하인천 부두 근처에서 흔히 맛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 집 한 군데밖에 남지 않은 듯하다. 세월이 다 바꾸어 놓은 것이다. 사람 입맛도 음식도….
그래서인지 벽에 걸린 감사장, 표창장이 모두 옛날 것뿐이다. 장수영, 유병택, 김해두, 홍승순, 안찬희, 최기선 등 역대 시장들 명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부인 권양숙 여사와 탤런트 박상민이 기억에 남고, 인근의 김관철 박사, 유완식 선생 등도 떠오른다. 그러나 두 분은 이제 고인이시다. 인하대 최원식 교수와 그 동기인 길병원 이태훈 원장이 종종 들르고, 최근에는 송영길 인천시장이 이 맛에 심취했다는 말도 들린다.
동구 화도진로 5번 길 11-3. 배다리 중앙시장 동쪽 입구에 국민은행이 있고, 거기서 송림초등학교 방향으로 몇 집 지나 다시 좌측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서면 간판이 보인다. 굳이 소개할 것은 아니지만 보신탕을 파는 ‘깜상네’가 송미정 인근 서북 방향으로 있다.
이 일대가 지금은 사람이 다 나가 마치 빈 도시 같이 적막하고 쓸쓸하지만, 송미정이 여기에 자리잡을 당시는 인천서 가장 번화하던 곳이었다. 중앙시장 입구쯤에는 일제 때부터 인천의 일류 냉면집 ‘금곡루(金谷樓)’가 있었고 일대에는 청요릿집, 호떡집이 들어와 영업을 하던 그런 곳이기도 했었다.
(사진 설명. 송미정을 개업한 고 곽두삼 할머니(가운데) 가족 / 사진출처=굿모닝인천)
양식집 송미옥에서 출발, 1962년 복집으로 문패 달아
1959년, 그런 역사가 있는 곳에 송미정이 문을 열었고, 어느덧 반세기가 넘는 연륜을 헤아리게 되었다. 반세기라면 그럭저럭 노포(老鋪) 소리를 들을 만한 데, 그 세월 동안 송미정은 한결같이 좋은 맛을 냈고, 인천 사람들은 여일하게 발걸음을 했다는 뜻이다.
송미정은 지금 김현서(金顯瑞 68) 사장의 어머니 곽두삼(郭斗三 작년에 작고)씨로부터 비롯된다. 곽씨는 1·4후퇴 때 5살 현서씨와 현서씨 누이동생을 데리고 평양에서 피란을 나왔다. 수원을 거쳐 인하대학 자리 피난민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지금 동구의 서흥초등학교 건너편 한 셋집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북에 남은 채였다.
중학 학력이 전부였지만 재주 많고 강단과 부지런함을 겸비한 곽 씨는 당시 인천중공업에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인 기사의 식사를 맡아 하게 된다. 곽씨의 음식 솜씨가 좋았던지 7년간이나 중공업 주방에서 독일인 양식 수발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양식 조리법을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1959년 중공업을 나와 현 주소로 이사한 뒤 처음에는 양식집 ‘송미옥’(어머니 곽씨의 작명으로, 현재도 영업 감찰에는 원 상호인 송미옥으로 되어 있다.)으로 문을 연다. 단출한 양식메뉴에다 우리가 선호하는 갈비찜과 오뎅 그리고 생선초밥과 복요리를 추가했다. 당시 이런 비슷한 메뉴를 가진 곳이 신포동의 ‘화선장’이나 ‘미락’ 같은 식당이었다.
그러나 양식은 양식대로 또 갈비찜은 갈비찜대로 값이 만만치 않았고, 또 식당의 메뉴도 전문화하는 추세여서 다 치우고 오로지 복요리만 전문으로 선택했다. 그때가 1962년. 이 무렵에는 신포동에 ‘천미복집’이나 그보다는 좀더 대중적이었던 ‘향촌’, ‘향원’ 같은 복집이 성업할 때였다.
(사진 설명. ①30년 이상 사용한 생선회감용 칼들 ②히레사케(데운 정종에 말린 복지느러미 넣은 술) / 사진출처=굿모닝인천)
참복은 회감, 밀복은 탕과 튀김용
김 사장이 어머니의 후계자로 낙점을 받은 것은 1965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 제대 이후. 수산고등학교를 나와 세상 공부를 할 요량으로 인천판유리에 입사해 몇 달 근무하다가 군대에 갔다 오고, 몇 년 뒤 복을 다루는 면허증을 취득하면서부터 온전히 가게를 맡게 된다.
송미정의 연륜이 쌓이면서 김 사장은 동구주민자치협의회장 같은 직책을 맡기도 했다. 더불어 인천시음식업조합 운영위원도 맡게 되고, 그의 무던한 인품은 연속해서 다문화가정 후원회장, 사이클연합회 회장 그리고 금성산악회 회장직도 맡게 한다. “아들애가 이걸 맡아 하겠다고 해서 아주 다행입니다. 그러면 이제 3대째가 되는데 생각 같아서는 백년, 이백년 내려갔으면 싶어요.” 아들 상민(想民)씨한테 맡기고 본인은 홀가분하게 바깥일이나 보면서….
새벽 4시부터 그날 쓸 물건을 다루다 보면 아침 8, 9시가 된다. 그래서 송미정은 점심과 저녁만 낸다. 참복은 그 창호지처럼 얇게 혀 위에서 녹는 횟감으로, 밀복은 탕이나 튀김용으로, 주로 동해안과 제주도에서 잡힌 것만을 쓴다. 배추, 무, 파, 마늘 고춧가루 등속은 모두 처가인 강원도 철원에서 청정(淸淨) 그대로 조달한다. 또 아무리 힘이 들어도 고추장, 된장, 김장은 모두 손수 담근다.
이렇게 50년 넘게 식객의 배를 불리고 주객의 다친 속을 다정하게 다스려주었으니 가히 ‘착한 집, 좋은 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집이 3대 이상 유지되는 경우, 시나 구에서 무슨 인센티브 같은 것을 주어 더욱 북돋운다면….
(자료 = 굿모닝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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