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간이 모여 있는 중구 도원동 황골고개는 인천의 유일한 철공소 거리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대장간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대장간의 불씨는 쇠를 달군다. 불 냄새 활활 태우며 단단한 쇠를 말랑말랑하게 주무르는 대장간이 불과 함께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탕탕탕~’ 힘찬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인천의 마지막 대장장이들이 모여 폭염 속 구슬땀을 흘리는 황골특화상품거리는 2012년에 정식으로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그 이전 누가 이름표를 달아주지 않았어도 누구나 다 아는 대장간과 철공소의 거리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한 집 두 집 이곳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6.25 전쟁을 겪으며 북에서 피난 나온 몇몇 대장장이도 그곳으로 모였다. 어려운 시절엔 함석을 이용해 물통과 연통, 난로 등을 만들어 팔았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쓰임새가 다양한 연장들의 주문과 판매가 늘어났고 철공소의 수도 자연스레 늘어갔다.
가장 번성했을 때는 옛 공설운동장 주변에서부터 배다리철교 까지 대장간들이 양쪽 길로 마주보고 이어졌다. 철도가 복선이 되면서 한쪽 길을 철길에 내주었다. 현재의 맞은편에 있던 건물들이 허물어지고 대장간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2차선 도로가 6차선으로 변하는 사이 대장간은 그렇게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현재는 도원철공소를 비롯해 인일 ? 인해 ? 인천철공소 등 4곳만이 남아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이곳은 쇠를 잘 다스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인천은 물론 서울 인근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한번 다녀간 그들은 단골이 된다. 지금도 그 유명세는 여전하다. 필요한 연장들을 만들기 위해 도안을 그린 종이를 들고 대장장이들을 찾는다. 볼펜으로 쓱쓱 그린 ‘설계도’를 갖고 와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 도구를 요구하기도 한다.
농사에 필요한 연장은 물론 굴과 조개를 캐러 가는 아낙들이 자신만의 연장을 갖기 위해 이곳에 온다. 일상에 쓰이는 모든 쇠의 도구들이 이곳에서 망치소리에 제 모양을 찾고 단단해진다. 고집불통같이 단단한 쇠들도 대장장이 앞에서는 자존심을 내리고 물러지면서 또 자존심으로 몸을 다진다.
‘안 되는 게 어딨니?’ 이리저리 두들겨서 손님이 원하는 도구가 만들어진다.
‘탕탕탕~’ 힘차게 내려치는 대장장이의 손에 힘이 실린다. 불에 시뻘겋게 달궈진 뭉툭한 쇠가 대장장이의 손에서 몸을 비틀며 자리를 잡는다. 망치 끝에 닿은 쇠는 신들린 듯 불꽃을 이리저리 사방으로 튀긴다. 그리고 다시 불꽃이 이글거리는 불가마로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한다.
“칼 하나 만들려면 스무 번은 불에 달궈지고 수없이 두드리기를 반복해야 해. 이거 미국으로 물 건너갈 칼이야. 한국 사람이 미국으로 맞춰가는 거지.”
도원철공소 대장장이 나종채(66세) 씨는 정글에서 쓰는 칼을 만들고 있다. 그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정글도(刀)는 비행기를 타고 타국으로 건너갈 예정이다.
그는 대장장이로 48년 째 살고 있다.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 시골 대장간에서 일을 조금씩 배웠다. 그는 잠시 ‘한독금속’ 단조반에서 일을 하다가 인천 황골고개로 왔다. 도원철공소를 차리고 대장장이로서 흰색머리카락의 수를 늘렸다.
그와 함께 나이를 먹은 연장들이 불가마 곁에서 무심히 먼지를 먹고 있다. 무쇠망치는 달아 무뎌지고 나무 망치자루도 힘을 다했다. 그가 아끼는 물건들이다. 그중 제일은 모루다. 쇠를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쇠 중에 쇠다. 우직한 쇠뿔 같은 모루는 그와 함께 대장간을 지키며 수많은 연장들을 완성시켰다. 모루의 힘은 여전히 혈기왕성하다. 그가 내려치는 망치의 매를 고스란히 받으며 대장장이의 뜻에 따른다.
모루는 그보다 나이가 많다.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내려와 대장장이를 하던 선배에게서 1966년도에 물려받은 것이다. 선배도 20년 넘게 사용했으니 적어도 70년은 됐다.
“쇠는 내 손에 들어오면 꼼짝 못해. 한 번 보면 다 만들어. 정확하지. 사람들은 내 눈이 무섭다고 그래”
대장장이는 솜씨도 있어야 하고, 힘도 좋아야 하며, 눈썰미에 끈기까지 요구되는 직업이다. 눈썰미 있어 기술 습득이 빠른 사람도 10년이 돼야 기술자 소리를 들으며 일할 수 있다. 그만큼 대장장이로 사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일이 힘들고 예전만큼 수입도 따라주지 않으니 일을 배우려는 사람도 없다. 철물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내는 기성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값싼 중국산까지 물밀듯 들어와 정성들인 수제품도 헐값에 팔린다. 대장장이들이 점점 사라지는 이유 중 하나다.
“이제 우리가 끝인 거 같아. 그동안은 그럭저럭 유지는 됐는데 엄청 힘들어. 내가 죽기 전에 무형문화재로 인정해줬으면 하는 바램이야. 그럼 그나마 이게 이어질 텐데...”
아쉬움을 토로하며 미소 짓는 그 얼굴에 굵은 주름이 패인다.
“물건 건네주고 잘 쓰고 있다고 전화 올 때 보람되고 기쁘지. 그 맛에 계속 이어가는 거야. 그게 대장장이지...”
대장장이는 기원전 10세기 청동기의 출현과 동시에 등장했으니 물경 3000년의 전통을 가진 직업이다. 신라의 왕 석탈해(昔脫解)도 대장장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오랜 부침을 겪었지만, 그러고 보면 대장장이는 왕의 후예다.
‘쇠를 잘 다뤄야 나라가 흥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쇠는 부와 강인함을 상징한다. 낫과 호미 등 연장이 되기도 하고 칼과 도끼 등 무기가 되기도 하는 쇠. 그 쇠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곳은 대장간이다.
세월의 거센 바람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왕의 후예들이 부르는 ‘대장간의 합창’과 대장간 화덕 속의 불꽃은 이제 점점 사그러들고 있다.
김민영 객원기자 gem0701@hanmail.net
자료 : 인천광역시 인터넷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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