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 개항, 바다의 문이 열릴 때 한국으로 무작정 건너와 낯선 인천 땅에 발을 디딘 선교사들이 있었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선교 사업과 구호 활동을 하던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편안하게 머물 공간이었다. 조선의 전통가옥을 개조해 지냈지만 서양가옥에 익숙한 선교사들은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특히, 여선교사들은 일상적인 곤욕을 치르며 생활했을 것이다. 강제적인 한일합방 이후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 더 이상 배를 타고 선교여행을 다니지 못하면서 안정적인 주거 공간은 더욱 절실해져만 갔다. 이에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동쪽 언덕에 남선교사 합숙소와 여선교사 합숙소를 건축하고 한반도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게 된다.
여선교사 합숙소
1905년에 건축된 여선교사합숙소 외형은 파란 지붕과 붉은 벽으로 이루어진 근세 북유럽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목조로 지어진 내부의 지하는 보일러실과 창고로, 1층은 여성교인 지도자를 교육하는 곳으로, 2층은 선교사와 매일학교 교사들의 침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창호(窓戶)는 조선시대 서원이나 사찰의 승방(僧房) 등에서 볼 수 있는 용자(用字) 살을 원용하고, 가장자리는 교살(빗살) 모양으로 살을 짜 넣어 전통을 살린 것이 독특하다.
향토사학자 최성연은 <개항과 양관정>에서 “선교사들의 별천지”라 칭하며 ‘20년 전만 해도 윤이 짜르르 흐르는 잔디밭이 언덕 전체를 덮고 있었고 멋지게 손질된 수목들 사이에 세 채의 양관이 삼각형의 정점 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묘사한 ‘멋지게 손질된 수목들’이 여전히 합숙소 주변을 지키고 있어 당시의 아름다움을 짐작케 한다.
이곳은 인천 여선교사들의 합숙소일 뿐만 아니라 서울과 평양에 주재하고 있는 여선교사들이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는 휴양공간이기도 했다.
합숙소에 머물던 여선교사 중에는 영화학교의 교장 교사 이면서 인천지역의 선교활동을 했던 인물이 많다. 그 중 코스트럽(Alfrida Kostrup, 고수도(高壽道))은 기독병원 간호부장으로 있으면서 선교와 구호활동을 펼치며 유아 진료소를 열었다. 주변 주민들에게 사랑 받으며 ‘헤스 부인’으로 불리던 헤스(Margaret Hess, 과시(裹施))는 27년간 인천에만 머물며 3대 교장으로서 학교 발전에 공헌하고 인천 최초의 유치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교회 박해가 심해지던 일제 말, 그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강제로 출국해야만 했다.
1949년 4월, 다시 한국에 들어온 미국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 합숙소는 ‘인천 기독교 사회관’으로 개명된다. 얼마 뒤 6.25전쟁이 일어나, 잠시 폐쇄됐지만 1956년부터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교육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가난한 아이들을 교육하고, 혼혈아 양자들의 입적, 영아 보건 등 사회 소회 계층을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1993년에는 건물의 역사적ㆍ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재단의 통합 및 몇 번의 증축이 있은 후 2003년 4월 창영감리교회에서 인수하여 이전 재단과는 별개인 ‘창영사회복지관’으로 운영하며 보존하고 있다.
남선교사 합숙소
1897년 세워진 남선교사 합숙소의 정원에는 잡초가 우거져 인근에서 끌어다 먹이는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었다고 한다. 학교 운동장에서 운동회라도 열리는 날이면 인근 주민들이 몰려나와 구경할 정도로 넓었다. 이곳에는 누가 살았을까. 그 당시 제물포 지역에서 활약한 남자 선교사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케이블(Cabule)목사는 1899년 내한 연희전문교수를 거쳐 1902년 한국서지방(제물포 해주 강화 부평)감리사를 역임했고 젠센(Jensen) 목사는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하기 전까지 인천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선교사들이 더 이상 살지 않게된 남선교사 합숙소는 1942년경 민간인이 살다가 조선알루미늄공업주식회사가 사들여 직원 합숙소로 사용됐다. 광복 후에는 경기도 경찰전문학교의 사택으로 쓰였다. 1955년 동인천 세무서 청사로 개축되었고 현재는 인천세무서로 사용 중이다. 2013년 지금, 그 주변의 골목은 도로로 넓혀졌고 선교사 저택 정원은 물론, 소들이 노닐던 풀밭에도 주택이 빽빽이 들어서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우리 땅, 우리의 아픈 역사를 함께하며 사랑을 전하고 헌신하던 그들은 이제 없다. 13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남녀선교사 합숙소도 지금은 다른 공간이 됐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 인천에 뿌리 내린 믿음이 오늘도 어딘가에서 사랑을 꽃 피운다.
창영사회복지관 (구 여선교사 합숙소)
인천광역시 동구 창영동 42-3번지
032-773-1733
글_주란 청년기자 rri0217@gmail.com
사진_홍승훈 작가
자료 : 인천시 인터넷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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