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풀린 실을 박음질하다 우각로길 바느질 40년 박의상실 이야기
처음 택한 직업. 그 일을 나이 먹도록 계속하는 것을 사람들은 천직이라 부른다. 과연 천직은 좋기만 한 것일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하다 보니 생긴 직업일일까. 그 옛날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는 인천 동구 우각로길에 자리한 박의상실 이야기이다.
실과 나, 나와 재봉틀, 세월 그러니까 박의상실의 태동은 지금으로부터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의상실이 동구 우각로길 배다리에 문을 연 시기이다. 지금이야 옷들이 넘쳐나지만 당시만 해도 맞춤양장은 옷을 입을 줄 아는 멋쟁이들의 패션 아이콘이었다.
박의상실의 대표이자, 다지이너이자, 재단사, 미싱사, 패턴사, 시침질을 하는 이가 나홀로 직원 박태순(60)씨다. 그는 70년대 당시 20대 여성들처럼 미용과 양재 중 양재기술을 선택한 경우다. 박 씨는 “처녀시절은 7식구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어요. 송현동 100번지에서 처음 의상실을 시작해서 그 후 배다리로 이전했어요. 지금의 명진스포츠 자리에 ‘미스박의상실‘이란 이름의 의상실을 정식으로 차렸어요”라고 말했다.
당시는 일감이 엄청났다. 그래서 기술자 4명이 1팀이 되어 의상실 일을 했다. 지금은 모두 내보내고 혼자해도 시간이 남을 만큼 맞춤양장 손님을 줄어들었다. 하지만 옷 입기를 즐기는 사람과 특수체형 손님들은 아직도 단골로 남아 37년을 같이 나이먹고 있다.
병마와 싸우며 지켜낸 일터 성실하고 손끝 매서운 박 씨. 그는 10년 경인전철 복복선 공사가 있기 전까지 이 자리에서 박의상실을 열었다. 그 후 공사관계로 집을 새로 짓고 살림집을 올린 것이 현재의 의상실이다. 그는 공장 기성복 사이에서도 맞춤 양장의 명맥을 이어왔지만 돈 보다 더 큰 시련도 잊지 않고 찾아왔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배다리산업도로 건으로 일터를 잃게될 처지에 놓였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웃 언니가 여기 큰길이 난다고 했어요. 구청에 알아보니 동네가 없어지거나 양쪽으로 갈려 이웃들과 생이별을 할 판이었어요. 번듯하진 않지만 평생 일 해온 터전이 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그에게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찾아온 암 선고. 박의상실 박 대표는 당시 수술과 항암치료를 번가라 이겨내며 배다리산업도로 반대에 주민들과 힘을 모았다. 소박하고 조용하게 옷을 지으며 이웃과 살고 싶은 소망. 그 바램은 다행히도 우여곡절 끝에 지켜냈다.
박 대표는 “동네에 시인, 미술가, 사진하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그 동안 알지 못한 우각로의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전국대학생 대상 건축공모전에 배다리일대 건물들이 꼽힐 정도로 역사와 사연이 담긴 곳에 제 의상실이 있다는 게 감사하죠”라고 말했다.
인천 동구 우각로길을 인사동으로 만들자 그 후 박 대표는 의상실 문을 잠시잠깐 걸어두고 동네모임에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다고 옷 짓는 일을 팽개친 것은 아니다. 그의 의상실에는 지금도 단골손님들의 옷 패턴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또 비록 오래된 영수증이지만 꼬박꼬박 여느 기업 못지 않는 기본서비스도 잊지 않는다. 신식 기계재봉틀과 대량생산을 위한 옷 패턴은 없다. 그래도 나만의 맞춤옷 기품을 아는 이들이 반갑게 찾아온다. 여기에 체형이 남달라 기성복에 불편한 손님도 단골들이다.
박의상실 문이 대낮에도 닫혀있을 때도 그는 바쁘다. 지역현안 토론회, 간담회 등에 참여해 우각로 보존과 발전에 머리를 맞대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인천 동구 우각로 일대를 서울의 인사동 길처럼 만들자는 의견을 냈어요. 물론 인사동처럼 화려하진 않겠지만 이곳만의 색깔을 보존하자는 취지죠. 또 올해는 한 때 배다리에 박경리 선생이 살았던 것을 기념해 박경리카페를 추진중이예요”라고 말했다.
서울 인사동의 의미를 담은 인천의 우각로 인사동 만들기. 지금도 박의상실을 지나, 오가는 관광객들에게 또 하나의 선물이 되어주지 않을까. (문의:032-773-8463)
김정미 객원기자 jacall3@hanmail.net
자료 : 인천광역시 인터넷 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