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골목 사이․다(多) ① 송현동
난민亂民과 빈민貧民을 품어 준 수도국산
동구 송현동은 산을 품고 있고 바다를 끼고 있다. 송현동 사람들은 바다는 공장에 내주고 산으로 들어와 살았다. 수탈과 전쟁에 밀려서 정착한 산등성이의 삶은 늘 고달팠다. 비탈길만큼이나 그들의 삶도 비탈졌다. 송현동 사람들은 거개가 난민(亂民)과 빈민(貧民) 사이의 구차한 삶을 살아갔다. 그 삶을 처절하게 지탱시켜준 것은 그 산, 수도국산이었다.
글 ․ 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 ‘민통선’ 수도국산
수도국산은 그들에게 어머니 품이었다. 하나의 산이기에 앞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숨쉬는 삶의 터전이었다. 송현동 사람들은 하루의 고단한 등짐을 내려놓고 밤새 그곳에 기대어 있다가 다시 다음날 새벽에 고갯길을 내려가 전쟁터같은 삶의 현장으로 향했다. 그 산은 따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들 신체의 일부와 같은 존재였다.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송림산(松林山) 혹은 만수산(萬壽山)이었다. 일제는 1910년 이 산의 꼭대기에 노량진에서 끌어온 물을 저장하는 배수지를 만들었다. 인천에 거주하는 자기 나라 거류민의 식수와 군수공장의 공업용수 그리고 인천항에 정박하는 기선(汽船)에 물을 대기 위한 것이다. 이 배수지를 관할하는 수도국이 생기면서 이 산은 수도국산으로 불리었다. 만수산이 그 몸통에 물을 채움으로써 이름처럼 ‘만수(滿水)’가 된 형국이었다.
▲ 송현배수지
수도국산은 근 100년 가까이 민통선(민간인 통제선) 구역이었다. 배수지 바깥으로 철조망이 높게 둘러 처져 있었고 정복을 입은 경비들이 24시간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당시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경계가 철저한 것은 배수지가 국가 주요시설로서 만약에 간첩이 물탱크에 독약을 타면 인천시민의 절반이 죽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함부로 그곳에 들어갔다가 잡히면 ‘간첩’ 죄로 감옥에 갈지 모른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높고 촘촘한 철조망일지라도 아이들의 몸을 막진 못했다. 숲이 우거진 배수지는 훌륭한 놀이터였다. 철조망을 뚫은 아이들은 나무총이나 칼을 들고 편을 나눠 총싸움을 했다. ‘밀림’ 속에서의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간혹 여자애들도 방학 숙제인 곤충 ․ 식물채집을 하기 위해 개구멍을 드나들었다. 아예 수도국산에 맞닿은 집은 구멍을 뚫어 놓고 제집 드나들 듯했다. 그곳에서 봄나물을 채취하거나 혹은 겨울 땔감 잡목도 얻을 수가 있었다.
▲ 서흥초교에서 본 수도국산
지금의 서흥초교 쪽으로는 1960년대 말까지 온통 비탈진 배추밭이었다. 배추 수확을 하고 나면 이곳에 웅덩이를 파서 인분을 퍼 날랐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이게 얼어붙어서 땅과 구분이 가질 않았다. 동네 아이들은 이것을 알지만 이웃 동네에서 온 아이들은 이 사정을 몰랐다. 그 아이들은 비탈길을 가로지르다 웅덩이에 빠지는 ‘사고’가 많았다. 똥 독에 올라 병원신세를 지곤 했다.
# ‘세월’의 때를 덕지덕지 묻힌 유물들
철조망 바깥으로 거대한 판잣집 동네가 산을 중심으로 해서 둥그렇게 형성되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시루떡 포개 놓은 듯 산 밑에서 꼭대기 까지 한뼘의 여유 공간도 없이 앞 집 어깨를 타고 올라섰다. 틈만 보이면 무단으로 밤새 집을 지었기 때문에 심지어 남의 집 마루를 통과해야만 내 집 마당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가옥도 생겼다.
▲ 솔빛1차아파트
5만5천평에 1천8백채의 꼬방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안방, 건넛방, 마루 할 것 없이 창문을 열면 달과 별을 볼 수 있었던 동네. 서울의 난곡과 쌍벽을 이루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달동네 수도국산은 1998년부터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에 들어갔고 송현동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터전을 내주고 밀려나갔다. 그 자리에 3천 가구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 솔빛마을이 들어섰다. 다행히 배수지 공간은 그대로 살려두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 수도국산박물관
▲ 달동네 박물관 앞길
사람은 떠났지만 그들의 애환이 담긴 살림살이들은 2005년에 개관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 남겨져 있다. 동네가 철거될 때 전국의 고물상이 다 모여 ‘진기한’ 물건들을 수집해 갔다. 뒤늦게 당시 동구청 직원 김철성 씨가 중심이 돼서 수집에 나섰다. 궁중이나 양반댁에서 사용된 고고한 유물이 아닌 우리 부모들이 사용했던 세간들이 ‘세월’의 때를 덕지덕지 묻힌 채 박물관으로 갔다.
# 돌산 밑의 수용소촌
얕은 골을 사이에 두고 수도국산과 이어진 산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산을 그냥 ‘돌산’이라고 불렀다. 한때 채석장으로 사용될 만큼 이름 그대로 단단한 암석으로 된 산이었다. 이 산 위아래에도 동네가 있었다. 아래에는 피난민 수용촌이 있었다. 6.25전쟁 때 황해도 등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합판, 천막 등을 주워서 집을 짓고 살면서 자연스럽게 난민촌을 형성했다.
▲ 옛 수용소촌
“내래 평안도 순천에서 혼자 내려왔지. 열아홉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발령을 기다리다 전쟁이 터져서 잠시 피한다는 게 벌써 60년이 되었어. 수용소촌에 처음 발을 딛고 여태까지 이곳에 살고 있지” 아파트 벤치에서 쉬고 있던 최영속(80) 할아버지는 평안도 사투리로 옛이야기를 할수록 눈가에 점점 이슬이 맺혔다.
수용소촌 옆에는 1960년대 중반 경에 연탄공장이 있었다. 황해도 피난민 출신 유진성(劉鎭成) 사장은 공장의 이름을 ‘황해연탄’으로 정했다. 근로자들은 대부분 수용촌에 사는 황해도 사람들이었다. 빈손으로 내려와 ‘3.8 따라지’라는 천대 속에서 가난하게 시작했지만 피난민들은 특유의 근면성과 강한 의지로 남한에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해 나갔다.
▲ 동네풍경
돌산 위에도 사람들은 위태롭게 집을 짓고 살았다. 밤새 하꼬방집이 들어서 자고나면 골목이 하나씩 생겨나기도 했다. 여름 장마가 끝나면 이 돌산 동네에는 천연 풀장이 만들어지곤 했다.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면서 수영을 했다. 80년대 초 이 돌산 동네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재개발 되었다. 이 대목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얽힌 이야기가 하나 있다.
취임 후 전 대통령은 산업시설 시찰로 인천제철을 택했다. 시찰단 일행은 먼저 인근의 수용소촌과 송현3동사무소를 들렀다. 이어 돌산 밑 길로 해서 인천제철 쪽을 가다가 산동네를 보고 깜작 놀랐다. ‘아니 인천에 아직 저런 동네가 있다니….’ 이 길은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 귀빈들의 산업시찰 루트이기도 했다. 대통령의 철거 지시가 바로 떨어졌고 1982년 돌산 위에는 10평에서 20평짜리의 5층 공영아파트 송현라이프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이 아파트 앞 쪽 수도국산 산자락에는 1967년에 설립한 숭덕중학교가 있었다. 제 6교회와 공민학교가 모태가 된 이 학교는 82년 남동구 만수동으로 이전해 여중과 여고로 분리되어 현재 약 2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학교가 떠난 이 자리에 한 동짜리 누리아파트가 세워졌다. 얼마 전 아파트 바로 앞에 수도국산을 관통하는 터널과 고가도로가 설치되어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질 않고 있다.
# 일찍 철들었던 송현동 아이들
6, 70년대 국민학교 교과서에 인천은 ‘임해공업도시’라고 설명돼 있다. 바다나 항만을 끼고 조성한 공업단지를 말한다. 송현동에는 바다를 끼고 있는 중후장대한 공장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제철이다. 1941년에 설립돼 요철을 생산한 조선이연금속은 해방 후 조업이 중단되었다가 대한중공업으로 재가동되었고 인천제철로 이어졌다. 이후 인천제철은 현대그룹으로 흡수되면서 현대제철로 그 이름이 바뀐다.
▲ 송현아파트와 공장지대
예전에 송현동 일대는 대한중공업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로 대낮에도 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누구 하나 그것을 탓하거나 시비를 걸기 보다는 산업화 시대의 자랑거리로 삼던 시절이었다. 송현동 아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철가루를 들이마셔 ‘일찍 철든다’는 자조적인 말만 오갔을 뿐이다.
▲ 송현변전소 옆 동네
당시 전국의 고물은 제철과 제강 공장이 있는 송현동으로 실려 왔다. 쇳덩이는 곧 돈이었다. 고물을 잔뜩 실은 트럭은 동네 청년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화수동 쪽에서 오는 트럭이 수문통 다리를 지나기위해 속도를 줄이면 재빨리 트럭에 올라타 돈이 될만한 쇳덩이를 갯골로 던져 버렸다. 물이 빠지면 ‘전리품’을 주워서 고물상에 팔았다. 그 시절 유난히 송현동에는 고물상이 많았다.
# 세느강과 몽마르뜨 언덕
송현동은 원래 산을 제외하고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골과 갈대 무성한 습지가 많았던 동네였다. 일본인 요시다는 1939년부터 43년까지 5년에 걸쳐 이 지역을 매립했다. 화평동과 배다리 까지는 갯골로 그냥 남겨 두었고 나머지는 땅으로 만들었다. 그는 매립으로 떼돈을 벌었고 그 일부로 송현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지금은 공립학교이지만 당시에는 사립학교였다. 매립해 만든 학교라 백중사리 때는 바닷물이 역류해서 교실까지 밀려들어왔다. 가끔 복도에 고기가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
바다와 연결된 이 갯골이 역사적으로 아주 요긴하게 쓰인 적이 있다. 고종 29년(1888) 서울에 있던 조폐창 전환국이 인천의 전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돈을 찍어내는 주조기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 운송에 어려움이 많았다. 육로보다는 물길을 택해 한강에서 배를 띄워 강화도 쪽으로 해서 만석부두 앞을 지나 수문통 갯골을 이용해 화평동까지 왔다.
▲ 옛 수문통 거리와 중앙교회
후에 화평동에서 인천중앙교회 옆까지는 1차 복개가 되어 수문통시장이 들어섰다. 슬레이트 지붕에 판자벽을 한 이 상가는 1층은 가게이고 이층은 살림집인 일종의 주상복합 건물이었다. 시장으로 시작했지만 화평동 쪽 입구에 순대집과 그 반대편 입구에 과일가게 몇 집만 장사를 하는 등 활성화되지 못했다. 결국 대부분 주거지로 사용되었는데 대낮에도 빛이 들어오지 않아 통로는 늘 어둠침침했다.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방바닥에 누우면 물결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복개 되지 않은 갯골은 작은 고기잡이배의 포구 역할도 했다. 한 여름에 아이들은 멱을 감기도 했고 어른들은 망둥이 낚시를 하기도 했다. 송현동 사람들은 이 갯골을 ‘세느강’, 수도국산을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불렀다. 결코 낭만적인 삶을 살진 못했지만 송현동 사람들은 빈곤 속에서도 그렇게 늘 낭만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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