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하는 인천/인천역사

그녀의 장수비결은 '기쁨', 박정희 할머니의 삶



새해를 맞아 할머니, 할아버지 댁을 찾는 일이 많다. 거리가 가까우면 신정에도 찾아뵈었을 것이고, 문안인사를 드린 후 구정 때 방문할 계획일 것이다. 

지난 1월 1일, 50여명이 넘는 세배꾼들이 박정희 할머니를 찾았다. 올해로 92세인 박 할머니에게 자식과 손녀가 많아서일까? 각지에서 모인 그들은 할머니와 어떤 혈연관계도 아니었지만 새해 인사를 드리러 화평동까지 찾아왔다. 그들은 할머니의 삶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박정희 할머니가 유명해진 건 ‘육아일기’ 때문이다. 지난 2001년 초판 발행된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가 2011년 6월 다시 발간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녀가 4남매를 키워내면서 꼼꼼하게 기록한 육아일기는 당시의 소소한 일상들과 교육법이 그림과 글로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의 육아일기는 기록물로 인정을 받아 국가기록원에서 보관중이다. 

“나는 남들처럼 맷돌질이나 뭐 그런 것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생 글 쓰고 그림 그리던 사람이라 그거 밖에 해줄 수가 없었지. 미안한 마음에 그렇게라도 아이들의 모습을 기록해두자는 거였어요. ‘아이고 예뻐, 그림 그려야지. 아이고, 예뻐, 글로 써야지’ 그러면서 그리게 된 거예요.”






수채화 인생

박정희 할머니는 점자를 창안한 송암 박두성 선생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인천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가난한 의사와 결혼해 평양으로 가 생활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 직전에 시댁식구들과 함께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23명의 대식구 살림을 도맡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떠들썩한 와중에도 박정희 할머니는 육아일기까지 작성하며 살뜰히 가족을 돌보았다. 육아일기의 주인공은 5남매는 지금 대학교수, 화가 등으로 성장했다. 아이들이 품을 떠나고도 박정희 할머니는 붓과 펜을 놓지 못했다. 67세에 한국수채화협회에서 화가로 추대되면서 그의 수채화 인생이 시작되었다. 각지에서 수채화전시를 하며 화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평안수채화’는 박정희 할머니의 작업실이자 오랜 집이다. 남편이 운영하던 병원 건물에 그대로 살면서 벌써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이 자리에 있다. 49년 ‘평안의원’이라는 패가 걸렸던 자리엔 ‘평안수채화’가 대신 자리 잡았다. 92세인 박정희 할머니는 아직도 ‘현역’이다. 매일 그림과 글을 쓰며 하루를 보낸다. 

월, 수, 금, 토요일은 제자들이 찾아오는 날이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의 연령층도 다양하다. 그림을 배우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평안수채화에 들어올 수 있다. 





임예순씨는 박할머니 곁을 22년동안 지켰다. 평일엔 일을 마치고 평안수채화로 퇴근을 할 만큼 열성적인 제자다. “선생님은 배울 것이 정말 많은 분이예요. 그림 뿐 아니라 인생, 돈관리, 사람의 욕심 같은 것들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해주세요. 이분은 인천의 보물이예요.”

임씨는 늘 박 할머니의 일을 돕는다. 박정희 할머니도 임씨의 마음을 알고 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잘 움직이지를 못하니까 저 친구가 다 해주는 거야. 스스로 조교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 고맙지요.”


임예순 씨



박정희 할머니를 존경하는 이유

박할머니는 92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소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주로 ‘얘, 너 ~하니?’같은 말투로 애기했다. 청년기자가 학창시절 황순원의 ‘소나기’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옛 소녀의 말투였다. 박할머니는 대화 중간 중간 농담을 건네기도 하시는데, 그때마다 혓바닥을 살짝 보이며 웃으셨다.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그 모습이 정말 귀여운 소녀 같았다. 표정이나 말투, 손짓하나에서 장난끼 어린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박정희 할머니



“지난주에 EBS에서 ‘장수의 비밀’인가 뭔가에서 촬영하러 왔었어요. 장수의 비밀? 장수하려고 노력하나? 안 해. 그냥 강물에 떠밀려가는 가운데서도 ‘쉬지 말고 기뻐하라’는 성경말씀을 기억하면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그렇게 사는 거지. 그랬더니 사람들이 와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고 그래. 그래서 내가 취재진한테 말했어. ‘얘, 오버하지 마라. 젊은 사람들도 살기 어려운데 내가 버티고 살려고 애쓰는 거 아냐’라고.”






박정희 할머니는 뿌리부터 밝기만 한 사람 같았다. 인생에 급급해 하지 않고 여유를 가진 자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편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녀는 유머와 긍정적인 마음을 보이는 여유가 있었다.

“남편이 돌아가니까, 애들이 전부 휴가를 내고 온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휴가 한번 못 내고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모처럼 휴가를 내고 왔지. 그걸 보고 내가 자식, 손자들을 두고 ‘할아버지가 땡큐구나’라고 했어. 내가 그런 사람이더라고. 그때 애들이 우스워서 막 웃더라고.”





박 할머니는 새해에 받은 카드들 중, 딸이 보낸 카드를 다시 꺼내보았다. 그 속에는 어머니를 존경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아들, 딸들은 그녀의 삶을 닮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 구절을 읽은 박정희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혔다. 

“이러니 얼마나 좋아.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딨어... 내가 몸을 배배 꼬고 움찔움찔하고 그래, 늙어서. 그러니 내가 골이 나지. 내가 그러는데 날 보살피는 사람은 오죽하겠어. 그러니 고맙지. 내가 움직일 때마다 ‘아유 아유’하는 데도 듣기 싫어하지 않고, 날 용서하고. 그렇게 미운 짓도 용서를 받는데 내가 남한테 화를 내면 쓰나. 그냥 기쁜 거야. 오늘도 내일도, 당장 죽는대도 기뻐하는 거지. 그게 장수의 비밀일까?”


자료 : 인천시 인터넷 신문(http://enews.incheon.go.kr)